공탁 쉬워지자 10개월 동안 1만8964건
檢, 선고연기 요청... 피해자 진술권 보장
현직 공판검사들 "돈으로 용서를 산다"
# 지난해 7월 인천에서 밤늦게 귀가하던 40대 가장이 음주운전 차량에 치어 숨졌다. 당시 운전자 A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취소에 해당하는 0.186%. 그는 재판에서 "뼈저리게 반성한다"고 했지만, 선고를 불과 13일 남기고 유족 몰래 3,000만 원을 '기습공탁'했다. 유족 측은 공탁금을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1심 재판부는 지난달 5일 A씨에게 징역 10년 형을 선고했다. 대법원 양형 기준(징역 4년∼8년 11개월)을 넘어선 이례적 중형이었다.
# 지난해 11월 광주에서도 1심 선고 직전 기습공탁으로 감형받은 음주운전범이 항소심에서 원심의 두 배 형량을 선고받았다. 징역 1년을 선고한 1심 형량이 너무 가볍다는 검찰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역시 유족 측은 공탁금 수령을 거절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유족을 위해 4,000만 원을 공탁했지만, 무면허 음주운전으로 보행자를 숨지게 한 책임이 가볍지 않다"며 원심을 파기했다.
기습공탁을 악용한 감형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공탁은 피고인이 피해자와 합의하지 않았을 때 법원 공탁소에 일정 금액을 맡겨 피해 보상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종전엔 피해자 인적사항을 알아야 공탁이 가능해 피고인이 불법 취득한 개인정보로 피해자를 찾아가 협박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2022년 12월 도입된 보완책이 '형사공탁 특례제도'다. 피고인이 피해자 정보를 몰라도 공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생활 보호와 2차가해 방지라는 당초 취지는 갈수록 어그러졌다. 대법원 양형기준상 감경 요소에 포함되는 공탁의 이점, 즉 감형을 노린 일방적 공탁이 빗발친 것이다. 피해자 의사에 반하면 감경 요소에서 배제한다는 규정이 없는 점도 기습공탁을 부추겼다. 실제 특례제도 시행 뒤 지난해 9월까지 약 10개월간 전국에 접수된 형사공탁 사건은 1만8,964건, 공탁액은 총 1,151억 원에 달한다.
검찰이 '꼼수' 감형 시도에 칼을 빼들었다. 대검찰청은 7일 "선고연기나 변론재개 신청, 재판부에 피해자 의사 제출, 신중한 양형 판단 요청 등 다양한 방안으로 기습공탁에 적극 대처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검은 지난달 개최한 '전국 공판부장검사 회의'에서도 피해자 의사에 반한 일방적 공탁이 감형 사유로 반영되면 적극 항소하기로 뜻을 모았다. 대검 관계자는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공탁 관련 양형인자 적용 시 피해자 의사를 고려하도록 의견을 개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직 공판검사들도 현행 공탁제도에 쓴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공판2부(부장 김해경) 소속 손정아(40·변호사시험 1회), 박가희(36·사법연수원 45기), 임동민(31·변시 8회) 검사는 지난달 31일 대검 논문집 '형사법의 신동향' 겨울호에 실은 '형사공탁의 운용현황 및 개선방안 연구'에서 "피고인이 피해자의 용서를 돈으로 살 수 있게 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고인의 공탁 사실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고하는 현행 제도가 기습공탁 피해를 키우고 있다"면서 "형사공탁 사실을 원칙적으로 피해자에게 고지해 의견 제시의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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