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의 팬덤 정치 편승한 정치인들
'문빠' '태극기' 방치한 정치권 책임도
각성 없으면 또 다른 테러 발생 가능성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피습 사건을 지켜본 민주당 초선 A의원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불과 며칠 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총선에 출마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라는 익명의 신변 위협 메시지를 받았던 기억이 스쳐서다. A의원은 4일 본보와 통화에서 "평소 ‘문자폭탄’도 폭력이라고 느꼈는데, 더 큰 어려움은 일일이 대응할 수도 없다는 점이었다"며 "이런 현실이 두렵지만 그간 우리의 대응도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복잡한 심경을 피력했다.
극단의 팬덤 정치에 기대 온 정치권이 화들짝 놀랐다. SNS 뉴스 댓글 등 온라인상에서 만성화된 정치인 겨냥 테러가 이 대표 피습이라는 끔찍한 형태로 현실화됐기 때문이다. 그릇된 현상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동시에 경쟁자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극단의 팬덤에 편승한 한국 정치의 모습은 어느새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정치권 스스로 "전조는 많았다"고 인정
이 대표 피습 사건의 충격에 빠진 정치인들은 이제서야 "전조는 많았다"고 후회하고 있다. 의원들을 향한 흔한 의사표현 수단이 된 문자폭탄이 대표적이다. 21대 국회에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설치법에 유일한 ‘기권’ 의사를 내비친 금태섭 전 의원은 이날 "당원들로부터 한 번에 2만 통 넘게 받은 적도 있었다"며 "그때 정치 지도자들이 잘못을 지적하지 못하면서 넘어간 것들이 부메랑이 됐다"고 지적했다. 실제 당시 민주당에서는 강성지지층인 '문빠'의 극성 팬덤을 향한 우려가 컸지만, 앞서 문재인 전 대통령의 '양념' 발언 등 지도자들의 안일한 인식 속에 팬덤의 폭주는 멈추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몸집을 키운 '태극기 부대' 역시 극단의 팬덤 정치를 부추기는 온상으로 지목된다. 보수 성향 정치인과 평론가들이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인지도를 높이기 시작한 이후, 점점 편향적이고 자극적인 정보를 필터링 없이 전하며 이제 보수 지지층의 ‘딥러닝’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야당과 야당 정치지도자들을 타깃으로 삼는다. 당장 이 대표 피습 당일부터 한 보수성향 유튜브 채널에선 “자작나무(자작극) 사건일 수 있다”며 음모론을 퍼뜨리는 등, 병상의 정치인을 거침없이 걷어찼다. 보수 진영 내부의 좌클릭 정치인들에 대해서도 낙인을 찍어 공격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2021년 한 보수 유튜버가 경북 구미시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한 유승민 의원에게 달려든 사건이 대표적이다.
김귀옥 한성대 사회학과 교수는 "수년 전만 해도 정치세력화, 네트워크에 중심을 뒀던 정치 팬덤이 수년간 SNS를 통해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을 반복하며 공격성을 훈련 해 온 모습"이라며 "이렇게 단련돼 온 공격성에 영웅심리가 더해지면 현실상의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짚었다.
1차 책임 정치권 각성 뒤따라야
전문가들은 팬덤 정치의 폐해를 방치한 정치권에 1차적 책임을 묻는다.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는 "인공지능(AI)만 딥러닝을 한 게 아니라, 극단의 지지층 역시 유튜브를 포함한 SNS에 떠도는 치우친 정보를 꾸준히 접하며 잘못된 정치학습을 반복해 왔다"며 "정치적 이해관계에만 함몰된 정치인들까지 편승하면서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고 지적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치권의 비상한 각성이 뒤따르지 않으면, 총선이라는 큰 이벤트까지 앞둔 상황에서 정치인을 타깃으로 한 테러는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이어진다. 국민의힘 한 초선 의원은 "정치 참여자의 의사표현을 수용해야 하는 게 정치인들의 의무지만, 이 대표 사건을 계기로 폭력적인 형태의 메시지가 분출할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 각 진영에서 상대를 악마화하고 적으로 간주하면서 쏟아낸 발언들이 ‘대화와 타협’의 기능을 삼키면서 폭력적 형태로 표출될 수 있다는 우려는 이번 사건 이전에도 곳곳에서 확인됐다. 지난해 3월 이 대표 체포동의안 직후 본보가 야권 팬덤의 ‘공격 대상’으로 꼽혔던 비이재명계 의원 관련 기사의 악성 댓글을 빅데이터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속어가 25%, 협박은 5.9%에 달했다. ‘죽어라’ ‘몸조심하라’ 등 직접적으로 신변 위협을 가하는 단어도 1.8%였다.
김 석좌교수는 "올해 우리나라가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정치권이 가장 면저 변해야 한다"며 "정치는 흑과 백이 싸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회색의 아름다움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란 걸 (유권자들에게) 몸소 보여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국민의힘 재선 의원도 "의원들도 싸움을 하더라도 도를 넘지 않는 표현을 쓰는 등 자성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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