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준 연세대 영문과 교수 '근대 용어의 탄생'
대통령, 민주주의 등 24개 단어 변용 과정 추적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개항의 시대, 미국을 맞닥뜨린 일본은 이걸 뭐라 번역해야 하나 고심했다. 결론은 '아메리카 합중국 대통령'이었다. 크게 거느리고 또 거느린다는, 단어 그 자체만 해도 이미 충분히 부담스럽고 권위적이기 이를 데 없는 '대통령(大統領)'이란 표현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러면 원문의 저 표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메리카 각 주들 연합의 의장' 정도면 충분하다. 이때 의장도 강력한 실권자가 아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고등법원에서 법안 심사를 진행하는 회의 관리자를, 영국에선 국왕의 자문회의를 여는 사람을 '프레지던트(President)'라 불렀다. 박력 있게 결단 내리는 느낌보다는 회의가 산으로 가지 않도록 중재하는 느낌이 강하다.
President는 원활한 회의 진행자 정도의 뜻
미국은 왜 신생 독립국 대표자 이름으로 프레지던트란 단어를 골랐을까. 징글징글한 영국 국왕과 싸워 독립한 미국은 '우리에겐 구대륙의 왕 같은 사람이 없다'라는 점을 내세우면서 정교한 삼권분립 체제를 만들었다. 그런 마당에 행정부 최고위직 이름에다 강력한 느낌의 단어를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고른 게 프레지던트다.
실제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일반 시민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기본적 예의를 지키는 정도의 표현만 있을 뿐 윗사람 아랫사람 관념 없이 거리낌 없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동등한 동료 시민들 간의 평등한 관계라는 의식이 강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천황'이 있는 일본은 이런 사정과 뉘앙스를 알 리 없다. 상대가 대국의 지도자라 하니 그에 어울리는 뭔가 어마어마한 단어를 고심했고 그 결론이 '대통령'이었다. 한국은 이 단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중국도 매한가지로 총통(總統)이라 번역했다.
'대통령' 용어 그대로 두고 협치 가능할까
정권이 바뀌면 핑퐁처럼 주고받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고치자, 제로섬 게임 대신 협치를 하라, 같은 주장을 실천하려면 제일 먼저 '대통령'이라는 이름부터 버려야 할지 모른다. 아니, 국가 지도자의 위대한 영단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왕조시대 관념이 살아있는 한 프레지던트를 뭐라 번역하건 간에 '제왕적 대통령제'는 우리의 DNA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윤혜준 연세대 교수가 쓴 '근대 용어의 탄생'은 이런 얘기를 한데 모아뒀다. 어떤 개념의 발생, 전파, 변용, 정착 과정을 추적하는 개념사 얘기가 적진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쓰는 민주주의, 산업, 자유, 헌법, 개혁, 혁명 같은 24개 기본 단어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접근이 더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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