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차 기자 은퇴 후 막노동 뛰어든 이유]
중년 반퇴자 자책감 육체노동 통해 떨쳐내
"노동자의 삶 마주하며 진중한 가르침 얻어"
"막노동이 나에겐 신세계였다. 만약 기자라는 옛 영화에 빠져 살았더라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내려놓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27년간 서울과 충청지역 여러 신문사에서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던 전직 기자 나재필(56)씨. 직급이 올라갈수록 기자 외의 일을 더해야 하는 현실에 회의감을 느끼고 2018년 조기 퇴직을 택했다. 건설현장의 일용노동직 이른바 '막노동'으로 인생 2막을 연 나씨는 "삶이 막노동 이전과 막노동 이후로 나뉠 만큼 변했다"고 말했다. 그 생생한 노동의 기록을 모아 최근 '나의 막노동 일지'(아를 발행)라는 책으로 묶었다.
나씨는 한국일보와 최근 서면 인터뷰에서 "20㎏ 자재를 종일 나르는 일도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 쪽잠을 자는 일도 처음이었고 간혹 화장실 앞에서 밥을 먹어야 했다"고 막노동 초기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젊은 시절에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노동이라 50대 중반의 초보 막노동자인 그에게 일은 고되기만 했다. 하지만 그는 "막노동을 처음 시작한 날, 인생의 가장 고단했던 하루로 몸이 천근만근 무너져 내리는 듯했지만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고 말했다. 중년의 반퇴자(이른 퇴직 이후 다시 경제활동에 뛰어드는 사람)로서 가졌던 무기력감과 자책감을 육체노동을 통해 떨쳐낸 것이다.
나씨는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짬짬이 휴대폰 애플리케이션(앱) 노트에 일상을 기록했다. 이를 '나의 막노동 일지'와 '베이비붐 세대의 애환'이라는 제목으로 지난해 2월부터 11월까지 한 인터넷 언론에 연재했고 독자들의 호응이 높아지며 누적 조회수 50만 회를 기록했다. 그는 "기자 했던 사람이 막일한다고 하니 관심이 쏠렸던 것 같다"며 "특히 건설 노동자들에게 많은 응원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나의 막노동 일지'는 이 연재들을 엮은 책이다.
그는 책을 통해 조기 퇴직 후 재취업을 위해 전전긍긍하다 2022년 대기업 건설 현장에서 시작한 막노동 현장을 생생하게 그렸다. 또 자신의 이야기뿐 아니라 당장의 생계와 노후를 위해 좌충우돌하는 베이비부머 세대(1955~63년생)의 애환도 담겨 있다. 나씨는 "베이비부머 세대는 퇴직 후 방황의 늪에 빠진다"며 "30년 직장생활을 했다고 해도 다음 30년을 먹고살 궁리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도 한식 조리사, 비계 기능사 자격증 취득부터 단기 일용직 아르바이트, 식당 설거지 보조까지 '일거리를 찾아다니는 하이에나'가 돼야 했다. "대한민국 중장년, 특히 60년생들의 재취업 기회는 바늘구멍보다도 좁다"(222쪽)는 피부로 느낀 냉혹한 현실이었다.
그가 막노동판에서 만난 노동자들은 모두 억척같은 인생을 살고 있었다. 홀어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막일에 아르바이트까지 뛰는 30대 청년,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난 뒤 빚을 갚으려는 50대 가장, 농한기에 몇 개월만 일하려 온 농사꾼 등 그들에게 막노동은 생존과 새로운 시작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나씨는 "노동자들의 삶을 마주하며 인생에 대한 진중한 가르침을 얻었다"고 했다. 슬픔과 고통에 맞서 당당하게 앞날을 개척하는 태도는 일터의 모든 이들에게 공통이었다. 자식 뻘인 'MZ세대' 청년들과 교감하며 젊은이들을 이해하게 된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나씨는 "2030세대를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세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틀린 말"이라며 "내가 만난 젊은이들은 자립하려는 열혈 청년들"이라고 강조했다.
막노동은 나씨의 인생 2막의 소중한 직업이 되었다. 그는 책에서 "막노동을 하는 게 자존심 상하지 않냐"는 지인의 말에 "'오히려 자존감이 올라간다'고 말한다"고 적었다. 자식들에게도 "누군가 아버지의 직업을 물으면 막노동한다고 솔직하게 말하라"고 강조했다. 책상 앞에서 원고를 쓰는 기자와 흙먼지를 뒤집어쓴 막노동꾼의 품격은 다르지 않다고 '인생 2막'을 웅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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