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연장근로 산정' 판결 파장>
사회 각계 "과로사 위험 높일 것"
"약자일수록 장시간 내몰려" 우려
노동자 전체의 25% 영향권 놓일 듯
고용부는 '노동시간 유연화' 움직임
노동계 "근로시간 상한 마련해야"
주 52시간 근무제 준수 여부는 일(日) 단위가 아니라 주(週) 단위로 따져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을 두고 노동ㆍ의학계에서는 ‘과로를 부추기는 판결’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26일 한국일보 취재에 응한 전문가들은 근로자의 건강권이 현저히 위험해진 만큼 ‘하루 13시간 근로시간 상한제 도입’ 등의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전날 대법원 판결의 핵심은 ‘주간 총 근로시간이 52시간을 넘지 않으면 하루 근로시간에 특별한 제약은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고용노동부는 행정해석으로 ‘하루 8시간’을 기본 근로시간, ‘이를 초과한 시간’을 연장근로로 해석하고 연장근로 시간이 한 주에 12시간이 넘지 않도록 규제하는 방식으로 과로를 막아왔지만 대법원은 판단을 달리했다.
당장 노동계에서는 근로자에게 하루 21.5시간(24시간 중 휴식시간 2.5시간 제외)씩 이틀 연속 철야를 시키더라도 나머지 사흘을 합쳐 9시간만 일하게 하면 기업이 법 위반을 피할 수 있다는 극단적 사례가 회자되고 있다. 이른바 ‘크런치 노동’(야근과 밤샘을 반복하는 장시간 집중 근무)이 이번 판결로 만연할 수 있다는 우려인 셈이다.
대법원은 ‘입법 공백’을 해소했다는 입장이다. "그동안 연장근로 한도를 계산하는 방법에 여러 방식이 혼재”(대법원 측 설명)했기 때문에 법원이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게 됐다는 것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이 연장근로와 관련해 ‘최대 52시간’ 한도 외에 구체적 산정 기준을 정하고 있지 않은 점을 지적한 것으로 풀이된다.
노동계에서는 ‘혼란만 부추겼다’는 반발이 거세다. 이미 일터에는 고용부 행정해석에 따라 하루 8시간을 기준으로 연장근로를 계산하는 방식이 대세라는 것이다. 한국노총은 “하루 8시간을 법정 노동시간으로 정한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고, 그동안 현장에 자리 잡은 연장근로수당 산정 방식과도 배치된다”고 했다. 민주노총은 “제조, 경비, 병원, 게임, IT 등의 현장에 ‘크런치 모드’ 등 노동 지옥이 합법적으로 열릴 것”이라고 했다.
의학계는 과로에 따른 건강 위협을 우려했다. 2019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과로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장시간 노동은 △심혈관질환 발생 위험 47% △정신질환 위험 29% △전체 사망 위험 9.7%를 높였다.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인 류현철 일환경건강센터장은 “하루 밤샘 노동만으로도 심혈관 질환 가능성이 커지고 과로사 위험이 높아진다”며 “사회적 상식, 근로자의 건강, 근로시간을 줄여온 세계 각국의 흐름과 동떨어진 판결”이라고 했다.
이번 판결의 직간접적 영향권에 놓인 근로자는 최대 521만 명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민주노동연구원이 내놓은 ‘노동시간 실태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8월 기준 ‘주 40시간 이상 근무’ 노동자가 521만 명, ‘주 52시간 이상 근무’ 노동자가 115만 명이다. 전체 임금노동자(2,099만 명) 대비 각각 25%, 5.5%다. 김종진 유니온센터 이사장은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의 경우 주 52시간 이상 일하는 비율이 22.5%에 달한다”며 "앞으로 노조가 없거나 대응력이 취약한 사업장은 더욱 장시간 노동에 내몰릴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지난 1월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게임산업 종사자 노동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게임업계 종사자 1,200명 중 19.1%가 최근 크런치 노동을 겪었다고 응답했는데, 300인 미만 사업장(규모별 17.9~25.0%)과 300인 이상 사업장(5.1%)의 격차가 컸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소규모 개발사의 경우 집중근로 기간을 늘릴 여지가 있다면 이를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고용부는 이날 입장문을 통해 “이번 판결은 바쁠 때 더 일하고 덜 바쁠 때 충분히 쉴 수 있도록 근로시간의 유연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합리적인 판결”이라며 “경제사회위원회 대화에 이번 판결 취지를 반영해 근로시간의 유연성과 건강권이 조화를 이루는 대안이 마련되도록 지원하겠다”고 했다. 노동계에서는 ‘주52시간제’ 개편을 추진해온 고용부가 이번 판결을 계기로 장시간 근무 허용을 다시 추진하려 한다는 관측이 나온다.
노동ㆍ의학계는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한 대안 마련을 요구했다. 류 이사장은 “영국, 독일 등 유럽처럼 근로일 사이에 11시간 정도의 최소 휴식시간을 보장하거나, 13시간 근로시간 상한을 도입하는 등의 대안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노총은 “연장근로에 대한 혼란을 막기 위해 국회가 입법 보완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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