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 불합격인데 아버지 청탁 덕 합격
은행이 해고하자 부당해고 구제 소송
아버지의 청탁 덕분에 입행한 은행원에 대해 '채용비리'를 이유로 해고한 것은 부당한 해고가 아니라는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인사 청탁이 아버지와 은행 간부 사이에서만 이뤄져 은행원 본인의 귀책사유는 없다 하더라도, 가족이 채용비리에 관여한 이상 본인 역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취지의 판결이다.
2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행정7부(부장 김대웅)는 우리은행이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를 상대로 제기한 부당해고 구제 재심 판정 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
이 부당해고 사건의 배경은 2017년 10월 심상정 의원의 폭로로 처음 드러난 우리은행 채용비리 사건이다. 이 사건의 해고 대상인 A씨는 2016년 신입행원 공채에서 원래는 서류전형 불합격 대상이었지만 아버지의 인사 청탁을 통해 입행한 의혹을 받았다. 채용비리는 수사로도 이어져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이 2015~2017년 행원 채용 과정에서 점수를 조작한 혐의로 2020년 유죄 확정 판결을 받기도 했다. 그러자 우리은행은 이 판결 등을 근거로 2021년 2월 A씨를 해고했고, A씨는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냈다. 중노위가 “해고사유가 없다”며 A씨 손을 들어주자, 우리은행은 이에 불복해 법원에 소송을 냈다.
1심은 중노위 판단이 옳다고 봤다. 재판부는 “해고의 근거가 된 은행의 인사관리지침 조항은 해고의 불이익을 받는 근로자(본인)의 귀책사유를 요구한다”며 “A씨가 부정행위에 직접 개입한 증거가 없는 점 등을 고려하면 서류전형 절차상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의 정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채용비리는 관리·감독하지 못한 은행 잘못”이라고 덧붙였다.
항소심은 그러나 “A씨와 은행 사이의 신뢰관계가 근본적으로 훼손돼 근로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면서 해고가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인사관리지침 조항과 단체협약 내용 등을 고려해보면 근로계약의 존속을 어렵게 하는 사유는 ‘근로자 본인’뿐만 아니라 ‘근로자 측’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는 경우면 충분하다”며 “채용비리가 부친의 직·간접적 관여로 촉발된 이상 근로자 측의 책임 있는 사유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은행 채용 과정에 대한 신뢰가 심각하게 손상된 점 △채용비리로 불합격한 사람들이 경제적·정신적 손해를 입게 된 점도 고려했다.
이번 항소심 판결은 우리은행 채용비리와 관련한 다른 부당해고 소송에서 중요한 기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은행의 해고가 정당했는지를 가리는 1심 결과는 여러 법원에서 엇갈리게 나오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채용비리로 수혜를 입은 사람을 해고할 수 있도록 규정한 법안도 발의됐다. 올해 5월 국민의힘은 “채용비리로 유죄판결이 확정됐다면 사측은 채용된 직원이 위법 여부를 인지했는지와 관계없이 채용을 취소할 수 있다”는 취지의 법안을 냈지만,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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