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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 주권(主權)의 상실

입력
2023.12.20 00: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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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 대통령 당선인의 달러화 공약
고물가에 시달리는 국가의 경제 고민
잘못된 경제정책의 후과 되돌아봐야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지난달 16일(현지시간) 코르도바에서 선거 유세를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지난달 16일(현지시간) 코르도바에서 선거 유세를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페소(peso)는 스페인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국가에서 주로 사용하는 화폐단위다. 최근 아르헨티나 대통령으로 당선된 밀레이가 선거 과정에서 '아르헨티나 페소'를 폐지하고 미국 달러를 공식적인 화폐로 채택하겠다는 달러화(dollarization) 공약을 발표하면서, 특히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페소라는 공통 명칭을 쓰기는 하지만 유로처럼 여러 국가가 사용하는 하나의 단일 공통통화는 아니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 페소와 멕시코 페소는 완전히 다른 화폐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자국 화폐에 페소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국가 대부분이 현재 높은 물가상승률을 보인다. 2022년 소비자물가상승률 기준으로, 최근 페소 폐지 논의가 나온 아르헨티나의 94.5%까지는 아니어도 필리핀 5.8%, 멕시코 7.9%, 우루과이 9.1%, 콜롬비아 10.2%, 칠레 11.6% 등 페소를 화폐단위로 사용하는 국가 대부분이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다.

과거 심각한 인플레이션에 따른 화폐가치 하락으로 폐지된 통화 가운데 페소 명칭을 사용했던 경우가 있었고, 심지어는 최근 아르헨티나의 논의처럼 인플레이션으로 자국 통화를 폐지하고 궁극적으로 미국 달러를 사용하는 데 이른 사례도 있다.

물론 현 단계에서 아르헨티나 신임 대통령의 공약처럼 페소가 실제 폐지되고 미국 달러가 공식적인 화폐로 사용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자국 화폐의 폐기는 금리 및 환율정책 등 각종 통화정책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정책 자율성과 대응 능력을 잃어버리는 결과에 이르기 때문이다. 즉, 아르헨티나의 경제 상황과 상관없이 미국 통화정책에 직접 영향을 받게 되고 자국 사정에 부합하는 정책 독립성 또는 경제 주권이 사라진다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에 따른 어려움이 독립적인 통화정책의 주권 상실 문제보다 크다면 자국 화폐를 포기하는 데 이를 수도 있다.

지금은 모두 유로 국가지만 1999년 유로 출범 이전에는 이탈리아 리라, 스페인 페세타, 그리스 드라크마 등 개별 통화가 사용됐고, 이들 국가는 모두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다만 유로화 채택 이후에는 이 국가들이 극심한 물가상승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자국 화폐를 통한 통화정책을 사용하지 못하면서 경기 대응 능력의 약화로 경제가 어려움을 겪었고 정책 대응의 부담이 재정정책에 몰리면서 재정 건전성 악화와 이에 따른 재정위기에 시달렸다.

다른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인플레이션 해결이 가장 시급하다면 그래도 고려할 수는 있다. 하지만 현재 아르헨티나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추가로 존재하기도 한다. 첫째, 아르헨티나 전체 경제활동에 사용할 정도로 미국 달러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둘째, 그렇지 않아도 자본이탈에 시달리는 아르헨티나에서 최소한의 환전도 없다면 달러 유출이 심화할 수 있다. 셋째, 해외경제 변동의 직접 영향으로 경제 불안이 악화할 수 있다.

따라서 공약과 완전히 일치하도록 아르헨티나 페소를 포기하는 극단적인 수준까지 이를지는 불확실하기는 하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페소화를 포기하고 미국 달러를 바로 사용하기보다는 일단은 50% 가까운 페소화 평가절하를 통해 시장에서 거래되는 환율이 현실을 반영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각종 문제점에도 자국 화폐 폐지라는 극단적인 정책 논의가 등장하고 이를 통해 인기를 얻는 상황이 왜 발생했는지 우리도 고민해야 한다. 결국은 독립성과 전문성에 부합하지 않는 통화정책이 누적되면서 아르헨티나는 현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어떤 경제정책이든지 발생할 수 있는 문제다. 경제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때 지금 아르헨티나처럼 정치적 선택이든지 1997년 외환위기 때 우리가 겪은 타의에 의한 강요든지, 사실상 경제 주권을 포기하는 상황에 언제든지 이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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