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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세 내지 말고 가족처럼 지내자"는 고시원 주인...믿어도 될까

입력
2023.12.21 10:00
수정
2023.12.21 18:56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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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이와삼 창단 20주년 기념 연극 '여기가 집이다'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극단 이와삼의 창단 20주년 기념 연극 '여기가 집이다'. 극단 이와삼 제공 ⓒ김명집

극단 이와삼의 창단 20주년 기념 연극 '여기가 집이다'. 극단 이와삼 제공 ⓒ김명집

연극 '여기다 집이다'는 극단 '이와삼'의 창단 20주년 기념 공연이다. 많은 이가 극단 이름 이와삼의 의미를 궁금해하면서도 애써 묻지는 않는다. 아마도 각자 짐작하는 바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와삼의 의미는 이렇다. 두 사람일 때는 나 아니면 너여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세 사람이 됐을 때 비로소 객관적 시각이 생긴다. 연극이란 끊임없이 주관적으로 호소하지만 객관적 거리를 유지할 때 이해되고 관계를 맺게 되는 예술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동안 이와삼은 연극적 판타지를 적절히 이용하면서 그 어느 단체보다 현실 문제에 천착하는 작품을 다뤘다. '여기가 집이다' 역시 그러한 작품이다. 2013년 서울 종로구 연우소극장에서 초연한 '여기가 집이다'는 대한민국연극대상 대상, 희곡상, 한국연극베스트7에 들었던 그해 대표적인 작품이다. 10년 전에 올린 바로 그 연우소극장에서 그때에 비해 최저시급도 평균 월세도 올랐지만 여전히 가짜 희망이 힘을 발휘하는 우리 삶을 들여다본다.

'사회 복귀 시도의 공간' 돼야 한다는 고시원 주인

극단 이와삼의 창단 20주년 기념 연극 '여기가 집이다'. 극단 이와삼 제공 ⓒ김명집

극단 이와삼의 창단 20주년 기념 연극 '여기가 집이다'. 극단 이와삼 제공 ⓒ김명집

20년 전통의 갑자고시원. 자신의 거처를 갖지 못하고 무거운 몸을 잠시 의탁하러 온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숨긴 채 모여드는 좁은 공간이다. 방값이 다른 고시원의 절반 수준인 이곳에는 주인 할아버지의 특별한 가르침이 있다. 자신의 먹을 것은 스스로 마련하고 적은 월세라도 꼬박꼬박 내라는 것.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뜻이다. 사라진 할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해 고시원을 운영하고 있는 경찰 공무원 출신 장씨는 "여기는 (식비와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집이 아니다"라는 주인의 철학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자신만의 집을 만들 준비를 하는 입주자는 없다. 일용직 양씨는 허구한 날 일을 나가지 않고, 최씨는 알코올중독자이며, 고시 공부 중인 영민은 온종일 영화만 보며 시나리오를 쓰지만 번번이 영화사에서 거절당하는 신세다. 퇴직 경찰 공무원 장씨 역시 아들과 불화해 가족을 떠나 이곳에서 혼자 지내고 있다.

이곳의 새로운 주인으로 할아버지의 고등학생 손자 동교가 나타난다. 할아버지는 죽었고 그래서 이 집을 물려받았다는 동교는 서류를 들고 와 새로운 고시원 주인이 된다. 갑자기 나타난 동교는 앞으로 월세를 받지 않겠으니 가족처럼 지내자고 말한다. 주인 할아버지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 장씨는 황당한 제안에 동교를 의심하며 반발한다. 동교는 이곳 사람들이 서로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며 가족같이 지내기를 바란다. 동교의 생각은 "여기가 집이다"인 것이다.

고시원 사람들은 동교의 말을 조금씩 받아들인다. 이들의 아내와 여자친구까지 고시원으로 모여든다. 동교는 아예 그들에게 고시원에서 일을 하고 월급을 받으라고 제안한다. 장씨는 동교에게 가짜 희망을 주지 말라고 반발한다. 그러다 장씨와 최씨 아내가 한바탕 다툰 후 이들은 화해의 술자리를 가지며 속내를 털어놓고 진짜 가족처럼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연다. 이곳은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방음이 되지 않는 곳. 각각의 좁은 방에선 억눌려 왔던 인간 본성이 담긴 사랑의 노래가 흘러나와 고시원을 가득 채운다. 이후 맨발로 무대를 다니는 이들은 인간성을 회복한 듯 편안해 보이고 이곳을 진정 집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장씨는 가짜 희망을 믿지 않고 고시원을 떠나 아무도 받아주는 이 없는 밖으로 나간다.

끝이 보이지만 그래도 소중한 '가짜 희망'

극단 이와삼의 창단 20주년 기념 연극 '여기가 집이다'. 극단 이와삼 제공 ⓒ김명집

극단 이와삼의 창단 20주년 기념 연극 '여기가 집이다'. 극단 이와삼 제공 ⓒ김명집

장씨는 세상이 믿을 만한 곳이 못 되기 때문에 긴장하고 의심하며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동교는 세상을 믿고 서로를 가족처럼 의지하며 살아가자고 주장한다. 어린 동교가 패배주의에 젖어있는 고시원 사람들에게 활기를 주고 희망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돈 덕분이었다. 고등학생인 동교가 얼마 동안 이들에게 월급을 제공할 수 있을까. 월급이 제공되는 동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얻고 현실에 나아갈 체력을 보충할 수 있을까.

현실에 쫓겨 허름하고 좁은 고시원으로 내몰렸던 이들은 맨발을 드러내고 환하게 웃으며 식사를 나눈다. 하지만 이 가짜 희망이 주는 위안에는 끝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성'은 장씨와 함께 고시원을 나서지만 '감성'은 그들 옆에 한 자리를 마련하고 수저를 들게 한다. 연극 '여기가 집이다'는 가짜 희망을 비판적 시선으로 보기보다는 가짜 희망으로 만들어 낸, 곧 사라질지도 모르는 인간 본성의 회복된 모습을 소중하게 기억하게 한다. 24일까지 연우소극장.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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