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 홍콩 2023 하반기 경매
중화권 인기 작가 산유·일본 구사마 야요이 경매가 1·2위
서양미술 표현 방식과 동양 이미지 결합
'초현실주의' 니콜라스 파티도 추정가 상회
미술품 경매사 크리스티 홍콩의 지난달 28일 하반기 20·21세기 미술 이브닝 경매에서 중국 현대미술 작가 산유(常玉·1895~1966)의 회화 ‘태피스트리의 누드(Femme nue sur un tapis)’가 1억8,737만5,000홍콩달러(HKD·약 311억 원)에 낙찰됐다. 이튿날 열린 20·21세기 미술 데이 경매를 포함해 이번 크리스티 홍콩 경매 최고가 기록으로, 최고추정가(1억5,000만 HKD)를 넘겼다. 동양인으로 보이는 한 중년 여성이 경매장 뒤쪽에서 패들(응찰용 손피켓)을 끊임없이 들어 올리며 전화 응찰대리인과 경합을 벌인 끝에 낙찰됐다. 그는 경매사가 낙찰봉을 두드리자마자 경매장을 빠져나갔다.
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300억 원대 가격만큼이나 이 작품은 독특한 면이 있다. 여러 방향에서 본 모습을 한 화면에 재구성한 서양미술사의 '입체주의'(큐비즘) 기법이 드러나는 유화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울퉁불퉁한 선, 표현의 평면성 등은 동양화를 닮았다. 아예 '십장생'인 학, 거북이 이미지까지 그려 넣었다. 서양 매체와 동양 이미지를 뒤섞은 셈이다.
고금리와 전쟁 등으로 인한 전 세계 경기 불황의 영향으로 최근 미술시장이 얼어붙었다. 이번 크리스티 홍콩 경매의 평균 낙찰률은 약 90%, 낙찰총액은 10억5,000만 HKD(약 1,736억 원)였다. 하지만 뜯어보면 흥행한 경매라고 평가하기 어렵다. 이는 지난 5월 열린 크리스티 홍콩 상반기 경매(낙찰총액 약 2,095억 원)보다 낮은 매출이다. 기존 인기 작품, 이른바 블루칩도 최고추정가를 넘지 못하거나 유찰된 경우가 많았다. 앞서 크리스티 측이 경매 출품 대표작으로 소개했던 이우환의 '점으로부터'가 유찰됐고,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의 '짙은 빨강(Dumpfes Rot)'도 경매 직전 출품이 취소됐다. 특히 29일 경매에선 국내에서 거장으로 손꼽히는 작가들의 출품작 7개 중 3개(이우환 '점으로부터'·'조응', 고 김창열 '물방울')가 유찰돼 충격을 줬다.
불황에도 잘 팔리는 현대미술, 동양의 선과 이미지 결합
하지만 이런 불황에도 잘 팔리는 작품이 있다. 산유 작가의 사례에서 보듯, 서양 매체에 동양의 이미지와 표현기법을 절충한 공통점을 지닌 작품들이다. 스케치와 채색 등 표현 방식은 서양미술을 기본으로 하되 동양의 선과 이미지를 결합함으로써 호소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예술성과 가치를 인정받는 방식으로 풀이된다.
이학준 크리스티 코리아 대표는 "동양 출신 서양미술 작가에게 서양 매체에 어떻게 동양의 정체성을 잘 표현하는가는 시대를 관통하는 큰 과제"라며 "김환기(1913~1974)도 이 같은 과제에 도전해 성공한 작가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환기는 서양미술에 동양의 이미지나 선을 차용하기도 했지만, 캔버스부터 바닥에 눕혀 놓고 유화를 그렸다. 서양미술가가 대부분 캔버스를 세워 놓고 그림을 그리는 것과 상반된다. 작업 행위부터 동양의 특성을 띤 그의 예술세계는 시대를 뛰어넘어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산유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미술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에 모여든 예술가 집단인 '에콜 드 파리(École de Paris)'의 일원이었다. 파블로 피카소(1881~1973),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 마르크 샤갈(1887~1985) 등과 전위적 작품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은 당시의 주류 화풍을 간직하고 있어 현대미술 작품으로 미술사에서 가치가 크면서도, 그 안에 동양의 정서를 포함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잘 팔리는 근래 현대미술도 '믹스 매치'
이 같은 특성을 띤 근래의 현대미술도 저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번 경매에서 두 번째로 높은 가격인 7,812만5,000HKD(약 129억 원)에 낙찰된 일본 태생 구사마 야요이의 그림 ‘꽃(A Flower)’도 이 같은 특성이 있다. 분명 서양미술이지만 무수히 많은 점을 찍어 꽃의 형태와 배경을 묘사한 것은 동양화의 ‘점묘’ 방식에 가깝다. 그는 물방울 무늬를 강박적으로 반복해 찍은 ‘호박(Pumpkin)’ 회화와 설치로도 유명하다. 1977년부터 정신병원과 작업실을 오가며 생활하는 그는 1957년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인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가 1972년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전개하며 동서양의 작업 방식과 표현을 절충한 작품 세계를 숙성했다.
이번 경매에서 최고추정가 300만 HKD를 훌쩍 뛰어넘는 390만6,000HKD(약 6억5,700만 원)에 낙찰자의 손에 넘어간 일본 태생 가토 이즈미의 ‘무제’도 이 같은 범주에 포함되는 작품이다. 아프리카 목각이나 탈을 연상시키는 사람 이미지를 변형한 추상에 가까운 구상이다. 도쿄의 무사시노미술대를 졸업한 그는 불교 조각에 많이 쓰이는 향내 나는 녹나무를 소재로 이 같은 조각이나 설치 작품을 내놨었다. 그의 작품은 생명과 자연은 물론 사물에도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일본의 ‘만신사상’에 기반한 것이다.
비슷한 특성을 띤 신진 작가의 작품도 이번 경매에서 흥행에 성공했다. 필리핀 출신 현대미술 작가인 로널드 벤투라의 ‘무제’도 응찰대리인 간의 경합 끝에 최저추정가(90만 HKD)의 4배가 넘는 가격(378만 HKD·약 6억2,700만 원)에 판매됐다. 이 작품은 동서양의 캐릭터가 포함된 기기묘묘한 이미지를 흑백으로 혼합한 작품이다.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풍경
초현실주의 작품도 각광받고 있다. 니콜라스 파티의 ‘겨울 나무들(Winter Trees)’은 지난달 29일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추정가 범위(1,100만~1,800만 HKD)를 벗어난 1,852만5,000HKD(약 31억1,600만 원)에 낙찰됐다.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풍경을 단순한 이미지와 따뜻한 색감으로 표현했다. 스위스 출신인 그는 초현실주의적인 구성으로 풍경을 연상시키면서도 추상에 가까운 그림을 그린다. 선명한 원색의 색감을 파스텔로 칠해 차가운 색을 썼지만 따뜻한 느낌도 준다. 구상에 가까운 추상이다. 팍팍한 현실을 잊고 잠시 공상에 빠지기 좋은 작품이다.
블루칩 작품마저도 고전을 면치 못한 약세장에서도 미술시장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명작은 고가에 거래됐다. 희소성이 있는 현존 작가의 작품이 눈에 띈다. 지난달 28일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일본 작가 고헤이 나와의 ‘픽셀-사슴32(Pixcell-Deer 32)’는 최저추정가(400만 HKD)의 두 배가 넘는 819만 HKD(약 13억7,700만 원)에 팔렸다. 작가의 작품 최고가를 경신한 기록이다. 물방울 모양 크리스탈로 실제 사슴 박제를 감싼 작품이다. 그는 시각의 왜곡과 변형을 드러내는 조각과 설치로 유명하다.
작가 별세한 명작, 불황에도 꾸준한 수요
작가가 별세한 현대미술 명작도 고가에 거래됐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은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1828~1987)의 그림 ‘꽃들(Flowers)’은 지난달 28일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추정가 범위(1,200만~1,800만 HKD) 내인 1,489만5,000HKD(약 25억563만 원)에 팔렸다.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프랑스 화가 마르크 샤갈(1887~1985)의 연작 회화 가운데 하나인 ‘붉은 천사와의 결혼(Mariés à l'ange rouge)’도 같은 날 추정가(630만~930만 HKD)의 상단인 806만 4,000HKD(약 13억 5,652만 원)에 팔렸다.
이들의 작품은 최근 한국 경매시장에서도 강세를 보였다. 서울옥션의 지난달 29일 미술품 경매 낙찰률은 60%(낙찰총액 약 20억 원)에 그쳤다. 그럼에도 워홀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캠벨 수프 캔(Cambell Soup Can)’은 최고추정가(4,000만 원)의 2배가 넘는 9,700만 원에 낙찰자의 손에 넘어갔다. 샤갈의 연작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소품 ‘필레타스의 과수원(Le Verger de Philétas)’도 추정가 범위(1,200만~2,500만 원) 내인 1,750만 원에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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