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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매매와 희망 사기

입력
2023.12.05 19: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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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박주영부장판사

편집자주

<어떤 양형 이유> <법정의 얼굴들>의 저자인 박주영 판사가 세상이란 법정의 경위가 되어 숨죽인 채 엎드린 진실과 정의를 향해 외친다. 일동 기립(All rise)!

삽화=신동준기자

삽화=신동준기자


미래 물건 사고파는 ‘희망 매매’
판매자의 성실한 노력 전제돼야
우리의 정치, 국민에게 성실했나?

매매는 ‘물건 인도’와 ‘대금 지급’ 간 합의로 성립한다. 일반적으로 매매 대상인 목적물 없이는 계약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미래 물건의 판매’(Emptio rei speratae)가 있다. 이 매매는 목적물의 취득 가능성에 따라 성립 여부가 결정되는 정지조건부 계약이다. 로마법에는 ‘희망 매매’(Emptio spei)라는 것도 있다. 아직 포획되지 않은 어류를 사는 것같이 요행수를 매수한 경우다. 물건의 존재 가능성조차 불투명하다는 점에서 미래 물건의 판매와 구별된다. 이때 매도인은 잡은 대로 주면 된다. 또 한 마리도 못 잡아도 매수인은 매매 대금을 줘야 한다. 희망 매매는 희망 그 자체의 판매이므로, 바라는 것이 생기지 않아도 유효하다. 단, 희망은 실현 가능해야 한다. 희망 매매의 예로 ‘추첨되지 않은 경품이나 복권 판매’를 들기도 하는데, 만약 이미 추첨 후 ‘꽝’인 복권을 팔았다면 그 계약은 무효다. 헛된 희망이기 때문이다.

이런 불합리한 계약이 있나! 로마인들은 바보인가? 그렇지 않다. 원래 매매는 물물교환같이 계약과 이행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현실 매매뿐이었는데, 로마인들이 구두 약속에 법률적 효과를 부여하면서 희망 매매도 가능해진 것이다. 구두 계약이나 희망 매매를 유효라고 보는 기저에는 상대방이 충실히 이행하리라는 믿음이 전제돼 있다. 희망 매매의 진정한 거래 대상은 요행수나 희망이 아니라 성실한 노력인 셈이다. 상대의 신뢰를 헛되이 하지 않도록 성의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원칙, 즉 신의칙(信義則)은 채무 이행에만 요구되다가 현재는 사법 전체에 적용되는 핵심 원리가 되었는데, 이것은 로마법상의 ‘신의와 성실’(bona fides)을 수용한 것이다(강현중 ‘로마법에서의 신의’).

희망 매매의 매도인과 매수인을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와 국민에 각각 대입해 보면 어떨까. 최근 기사의 헤드라인이다. ‘탄핵ㆍ예산 갈등 정쟁, 표류하는 민생법안’ ‘3분기 합계출산율 0.70명 역대 최저, 4분기 0.6명대 추락 전망’ ‘3년째 꺾이지 않는 교육비 지출, 사교육비 크게 늘었다’ ‘잡히지 않는 가계 빚 증가세에 한은 고민 깊어진다’ ‘노인 일자리 수십만 늘 때 청년 일자리는 되레 줄었다’ ‘월급 '찔끔' 오를 때 물가 '껑충' 실질임금 뒷걸음질’ ‘실질소득 감소 멈췄는데 저소득층 소득만 계속 감소’ ‘여성ㆍ청소년ㆍ이주민·장애인 지원을 위한 민간 위탁 사업 예산 전액 삭감’.

어째 매수인이 엄청나게 밑지는 계약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우리가 구매하려 했던 세상은 도대체 어디 있는가. 모두 잘 사는 희망찬 세상은 고사하고,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이라곤 저잣거리 싸움으로 인한 극도의 피곤함과 증오뿐이다. 로마인들은 사인(私人) 간의 말 한마디도 천금같이 취급했다는데, 2,000년이 지난 어떤 공화국의 관료와 정치인의 언약은 먼지보다 가볍다. 실현 가능한 희망을 제시해 주고, 희망의 쟁취를 위해 성심성의껏 노력해 달라는 국민의 요구가 그토록 어려운 과제인가. 애당초 정치인이 우리에게 약속한 희망이라는 게 실재하기나 한 것일까. 만약 그들이 처음부터 실현 불가능한 희망인 줄 짐작했다면, 채무불이행이 아니라 사기 아닌가.

아무리 봐도 올해 역시 글렀다. 희망 사기꾼들에게 또다시 호구 잡힌 것 같다. 사인이라면 손해 배상이나 형사 책임이라도 물을 텐데, 공인에게 따질 것이라곤 정치적 책임밖에 없다. 뾰족한 묘책이 없다. 그저 2,000년 전 사람들의 반의반만큼이라도 정신 차리는 수밖에는. 이런저런 사기로 세밑이 온통 우울하다. 법정도, 법정 밖도.

박주영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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