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지업체, 일제히 인쇄용지 할인율 조정
영세 인쇄업자 "생존 걱정해야 할 처지"
"가격 인상 결국 소비자에게 전가될 것"
"여기는 이제 끝났어요."
30일 오전 서울 중구 충무로 인쇄골목. 인쇄업체 사장 권모(59)씨는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12월부터 종이가격이 인상된다는 소식에 도무지 일손이 잡히지 않는다. 메뉴판, 스티커 등을 제작해 요식업체에 납품하는 권씨는 종잇값에 특히 민감하다. 종이가격이 오르면 다른 자잿값도 덩달아 뛰어 권씨 같은 2차 가공업체의 부담은 더욱 커진다. 그렇다고 납품가를 올리자니 거래처에서 일감을 끊어버릴지 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권씨는 "감염병 사태 후 일이 없는 날이 한 달에 절반은 되고, 수익도 40% 줄었다"며 "종이가격이 또 인상되면 사실상 남는 게 없을 것"이라고 절망했다.
물가 고공행진이 2년 넘게 지속되면서 민생경제 곳곳에서 파열음이 나고 있다. 인쇄업계도 그중 하나다. 제지원료인 수입 펄프값이 반등한 데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멈출 줄 모르는 유가 상승세까지 겹치면서 제지사들은 올해도 인쇄용지 가격을 인상하기로 했다. 계속된 침체를 겪는 인쇄산업도 문제지만, 가격 인상은 결국 소비자들에게 전가될 것이란 우려가 크다.
12월부터 인쇄종이 가격 8%P 올라
인쇄업계에 따르면 국내 대형 제지사 한국제지, 한솔제지, 무림페이퍼는 12월 초부터 인쇄용지 가격에 적용하던 할인율을 8%포인트씩 축소하기로 했다. 제지가격은 통상 기준가에서 구매수량 등을 감안한 할인율이 적용돼 결정된다. 기준가가 오르지 않아도 할인율이 축소되면 실질적으로 가격 인상 효과를 내는 것이다. 지난해 9월 할인율이 7%포인트 하향된 데 이은 2년 연속 축소로, 올해는 전시회 도록에 쓰이는 아르떼, 아티젠, 벽지 등의 가격도 조정된다.
관련 업계엔 벌써부터 절망감이 감돈다. 코로나19가 초래한 불황 터널에서 빠져나올 겨를도 없이 이젠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 이날 찾은 충무로 인쇄골목도 일감이 없어 소일하는 직원이 여럿 눈에 띄는 등 활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인쇄업 종사자 운모(55)씨는 "최근 인근에 생긴 음식점들은 원래 다 인쇄소였다"며 "코로나19가 터진 후 전부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실제 2019년 1,109개였던 서울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 회원사가 올해 6월 기준 959곳으로 줄었을 만큼 상황은 좋지 않다.
"직원 두 명 월급 그대로 빠져나갈 판"
영세사업자들의 고통은 더 심각하다. 제지 구매 물량이 많을수록 할인율이 오르는 구조라, 주문이 적은 영세업체들이 느끼는 인상폭은 훨씬 클 수밖에 없다. 벽지회사 대표 이모(60)씨는 "8%포인트 가격이 오르면 한 달에 종이를 50톤 가까이 쓴다고 할 때 800만 원 이상의 추가비용이 발생한다"며 "두 사람 월급이 그대로 빠져나가는 셈"이라고 말했다. 30년 동안 종이가방 등을 제작해 온 임모(43)씨도 "하청의 하청 입장에서 거래처에 인상분을 반영하기가 어렵다"며 허탈해했다.
종잇값 인상 여파의 종착역은 소비자다. 종이를 쓰는 책, 다이어리 등 소비재 가격 인상도 불가피한 탓이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출판유통통합전산망 자료를 보면, 종잇값이 연이어 인상된 지난해 정가가 변경된 도서 7,732종 중 80%(6,222종)가 가격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2021년 인상 도서(3,480종)의 두 배 가까운 수치다. 시민 탁은섭(29)씨는 "다달이 세 권은 꼭 읽는데 확실히 책값이 비싸졌다"고 했다.
제지업체들도 할 말은 있다. 인쇄용지 가격의 60%를 차지하는 펄프의 경우 미국 남부산혼합활엽수펄프(SBHK) 기준 6월까지 톤당 가격이 최저(565달러)를 찍었지만, 이후 반등해 705달러 수준으로 뛰었다. 두바이유 가격도 10월 배럴당 평균 89.75달러를 기록해 여전히 비싸다. 제지업계 관계자는 "우리도 적자 폭이 매년 확대되고 있다"면서 "2021년 4분기와 비교하면 종잇값은 사실상 10% 오른 정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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