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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망친 폭력적인 부모...복수하고 싶어요

입력
2023.11.27 04:3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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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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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는 취업을 준비하는 20대 여성입니다. 제게는 가정폭력을 일삼던 아버지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정폭력과 자살 시도 때문에 경찰을 몇 번이나 불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인이 되면서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커졌고 자주 다투면서 불화가 커졌습니다. 부모가 내 인생을 망쳤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괴롭고, 그런 부모로부터 여전히 독립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듭니다.

조울증, 강박장애 등 정신병력이 있던 아버지는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술 먹고 뻗은 아버지를 데려가라는 전화를 받았고, 아버지가 나체로 난동을 부리거나 칼부림을 하는 모습을 여과 없이 봐야 했습니다. 어린 저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다가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할 것이라고 협박하는 아버지를 보면 '사탄이 들린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해 인생을 망쳤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엄마는 '이혼'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자식들 때문에 차마 이혼을 못 한다고 했습니다. 혼자서 모든 집안일을 처리하면서 자식들에게 헌신적이었지만 아빠에 대한 피해의식이 커서 자주 하소연을 했고, 너희들이라도 말을 잘 들으라며 자주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런 가정에서 자라면서 환청과 불안증, 과민성대장증후군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청소년기부터 정신과에서 약을 처방받기 시작했습니다. 고3 때는 옥상에 올라가 투신 자살을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 좋은 대학에 들어갔지만 대학생활조차 순탄치 않았습니다. 성매매 중독자, 일베 유저였던 남자친구를 잇따라 사귀면서 남성을 혐오하게 됐습니다.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학과 내 성차별 문제나 성추행 문제 등에 맞서 싸우게 됐고, 남성에 대한 분노가 원동력이 돼 남자 동기들과 싸우면서 생활이 엉망이 됐습니다. 지금은 모든 남자를 혐오하진 않지만 여전히 남성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데 회의적입니다.

학과에서 왕따가 돼 도망치듯 늦은 교환학생을 떠났습니다. 헬조선을 벗어나 선진국에 정착하자는 생각으로 대기업 해외지사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회식 후 직장 동료의 집에서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서양인은 좋은 사람일 것이란 근거 없는 믿음 때문에 직장 동료를 신뢰한 탓이었어요. 직장에서 2차 가해를 당하면서 다시 도망치듯 귀국했고, 여러 일을 전전했지만 아직 취업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진실로 착한 남자가 있어도 믿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남자를 보는 제 자신의 안목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정년을 5년 앞두고 사표를 낸 아버지는 요즘 하루 종일 정치 유튜브를 보면서 정치인을 욕하고, 술을 먹으면 화를 내면서 8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와 교류도 없는 형제를 욕하며 신세 한탄을 합니다. 요즘에는 이런 아버지와 살면서 경제력이 없어 이혼을 못 하는 무능력한 어머니가 더 미워서 어머니와의 갈등이 깊어졌습니다.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제 동창이 변호사가 됐는데 그 친구의 아버지가 자식 교육에 열정적인 좋은 아빠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들은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크게 싸우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독립을 해야 하는데 자꾸 취업에 실패하고, 집에 돌아와 부모님과 갈등이 반복되니 답답합니다. 요즘엔 제 인생을 망침으로써 부모님께 복수하고 싶은 충동이 드는데 정말로 그런 결말을 맺을까 봐 너무 두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향한 분노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고, 부모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이민아(가명·29·취업준비생)

민아씨, 아버지의 인성과 능력을 떠나서 당신이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가 얼마나 컸을지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어릴 적 부모에게 받은 상처는 성인이 될 때까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습니다. 누군가는 여전히 부모에 대한 고통과 분노에 힘들어하는 당신에게 '어서 취업해서 부모로부터 독립해라'라고 할지 모르지만, 저는 당신이 그런 부모를 마음껏 미워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마음을 깊이 공감합니다. 당신은 왜 부모를 그토록 미워하면서도 관계를 회복하려고 하는 걸까요.

아이들은 누구나 부모에게 사랑을 원합니다. 조건 없는 사랑을 주는 부모라는 존재는 아이에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민아씨의 아버지는 부모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를 저버리고 오히려 해를 가했어요. 술에 취해 사람들과 다투고 칼부림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폭력을 행사했죠. 부모와 배우자, 자녀 등 누구와도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어요. 미성숙하고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자신이 딸에게 어떤 상처를 주고 있는지도 몰랐을 거예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민아씨의 상처가 더 깊어진 것은 아버지의 행동뿐 아니라 어머니가 그런 아버지에 대해 무력한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이에요. 아버지로부터 상처를 받았더라도 어머니에게 의지할 수 있었다면 그 상처가 그렇게 깊고, 괴롭지 않았을 거예요. 물론 어머니도 삶이 힘드셨겠지만 배우자에 대한 원망에 사로잡혀서 자녀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불안과 괴로움을 전가했습니다. 민아씨의 부모는 부모이지만 미성숙했고, 자녀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과 행동을 했습니다.

민아씨, 사람은 누구나 내가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민아씨는 살면서 내가 가장 소중한 대상으로 대해지는 느낌을 받아보질 못했던 것 같아요. 이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상처로 남고 살면서 상처가 건드려질 때마다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민아씨는 그 욕구를 부모님에게서 채우려고 했어요. 불완전하고 나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하는 부모이지만 여전히 의지하고 있고, 사랑을 받고 싶은 존재이기 때문이죠.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와 원망이 차오르지만 그 부모에게 끊임없이 매달리게 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양가 감정, 사랑과 미움 사이를 오기는 감정으로 얼마나 괴로웠을지 깊이 이해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부모와의 관계에서 오는 결핍과 혼란은 다른 관계에도 문제를 일으킵니다.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지나치면 의존적인 성향이 되기 때문이죠. 한 사람의 다양한 면을 바라보기보다 한 가지 측면에 쉽게 몰입되고, 관계로부터 쉽게 실망하고 상처를 받습니다. 상처가 반복되면 가까운 관계를 맺는 걸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론 사람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자리 잡게 되죠. 민아씨도 그랬을 거예요. 겉으론 명랑하게 잘 지내는 것 같은데, 늘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고, 기대고 싶을 거예요. 어떤 일도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에요. 그러면서도 사람에 대한 기준이 높아 그에 맞지 않으면 평가절하해버리거나 혹은 혐오 같은 나쁜 감정에 집중하게 되죠.

또한 민아씨는 어린 시절 반복된 학대를 경험하고 무력한 어머니를 학습함으로써 피학적 패턴을 발달시켜 온 것 같습니다. 피학적 성격의 특징은 피해를 자초하는 방식으로 방어적 행동화를 한다는 점이에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주 고통받고 만성적 불안을 경험하면, 적어도 스스로 고통당할 시점이라도 정하는 통제지향의 행동을 하는데, 이것을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전환’이라고 해요. 매사가 순탄하면 곧 폭풍우가 몰아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도발하는 것이죠. 내 인생을 망치고 싶은 이유가 부모에 대한 복수심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피학적 환경을 재창조함으로써 오랜 심리적 갈등을 극복하려는 시도인 것이에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제 생각에 당신은 꽤 유능한 사람입니다. 마음의 어려움이 많았던 환경에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입학했고, 스스로 외국에서 좋은 기회를 만들었죠. 성실하고, 분명 능력도 많은 사람일 거예요. 다만 오랜 심리적 갈등의 피학적 행동화로 인해 매번 실패를 경험하면서 좌절했죠. 그런 순간 함께 의논하고 위로해주는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한 민아씨는 남들보다 크게 좌절했을 거예요. 그러다 보니 목표가 높아지고,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또 생기면 포기하고 감정이 바닥을 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어요.

제가 민아씨에게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당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당신이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고, 당신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러면 고통스럽더라도 자신의 모든 삶을 받아들여야 해요. 무력했던 어린 시절을 자기 주도적으로 충분히 슬퍼할 수 있어야 과거와 현재의 현실을 구분할 수 있고, 그래야 오랫동안 반복돼온 피학적 행동패턴이 그 힘을 잃게 됩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가다보면 사람에 대한 불신과 집착이 줄고 안정적으로 지지받는 관계를 만들어가며 채워질 것 같지 않던 내면의 결핍 역시도 천천히 채워질 거예요. 부모에 의해 주도된 과거가 아닌, 성인이 된 민아씨가 주도하는 진짜 인생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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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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