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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강도시에 숨겨진... 반짝이는 동백숲과 시를 품은 바다

입력
2023.11.22 04: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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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옥룡사지와 망덕포구

편집자주

느린 만큼 보이는 사람, 마을, 자연. 매주 수요일 여행 감성을 자극하는 풍경을 찾아갑니다.


광양 옥룡사지 동백숲은 3~4월 꽃을 피우지만 양지바른 언덕에 형성된 숲이라 따사로움이 가득하다. 시린 겨울 문득 푸르름이 그리워질 때 찾아가고 싶은 곳이다.

북에서 내달리던 산줄기가 마침내 남쪽 바다를 코앞에 두고 멈춰 섰다. 가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은 듯 땅끝 산자락이 봉긋하게 솟았다. 전남 광양 구봉산전망대(473m)에 오르면 정면으로 광양제철과 컨테이너부두, 이순신대교로 연결된 여수까지 시원하게 조망된다. 좌로는 경남 하동과 남해의 산과 섬이, 우로는 순천의 너른 들판과 산줄기까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대부분의 여행객은 바로 이 장쾌한 풍광을 보기 위해 구봉산을 찾는다.


광양제철 이전의 진짜 광양

구봉산은 바닷길과 주변 지형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곳이라 오래전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봉수대가 있던 산꼭대기에 현재는 특수강으로 만든 9.4m 높이 꽃봉오리 모양의 봉수대가 반짝거리고 있다. 광양제철의 상징이자 고려 태조 23년(940) '광양'이라는 지명을 최초로 사용한 해를 기리기 위한 조형물이다. 밤이면 LED 조명이 불을 밝혀 분위기를 더하니 봉수의 본래 기능은 사라지고 낭만을 더하는 상징물이다. 구봉산전망대는 바로 아래까지 도로가 나 있어 쉽게 오를 수 있다. 사방으로 시야가 트여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고, 야경 명소이기도 하다.

구봉산전망대에 오르면 광양만 일대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정상에 특수강으로 만든 꽃 모양 봉수대를 세워 놓았다.


구봉산전망대에서 본 광양 컨테이너부두.


구봉산전망대에서 북측으로 백운산 자락에 자리 잡은 광양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모두들 광양을 제철 도시로 알고 있지만 진짜 광양은 따로 있다. 지금 시청이 위치한 곳은 광양제철 이후 형성된 신도시다. 오랫동안 광양의 중심은 현재의 광양읍이었다. 대부분의 관광객이 무심코 보아 넘기는 구봉산전망대 북측이다. 백운산에서 흘러내린 아늑한 계곡과 내륙으로 밀려드는 바닷물이 만나던 곳이다.

읍내 중심의 유당공원에 광양의 역사가 응축돼 있다. 흔히 ‘광양읍수와 이팝나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는 곳이다. 팽나무와 이팝나무, 버드나무 등이 어우러진 광양읍수는 1528년 광양현감 박세후가 읍성을 축조한 뒤 바다 쪽에서 왜구들이 볼 수 없도록 군사적 목적으로 조성한 숲이다.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이기도 하니 일석이조의 숲이다. 풍수설에 따라 마을의 허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가운데에는 아담하게 연못을 파고 수양버들을 심었다.

읍성을 보호하기 위해 심은 나무이니 '광양읍수'의 마지막 글자가 당연히 '나무 수(樹)'려니 여겼는데, 안내판을 보니 '늪 수(藪)'로 표기돼 있다. 수풀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녔으니 어울림의 공간이다. 현재 유당공원에서는 이팝나무보다 팽나무 한 그루가 더 눈길을 잡는다. 우둘투둘하게 생채기를 한 아름 끌어안은 밑동에서 가지 하나가 힘겹게 휘어져 있다. 광양의 역사와 이력이 굳은 듯하다. 현재 광양읍수는 유당공원을 비롯한 몇몇 곳에 단절된 채 남아 있지만, 그 옛날에는 2㎞가량 떨어진 마산마을까지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광양읍 유당공원에 아름드리 팽나무와 이팝나무, 버드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광양읍수와 이팝나무라는 명칭으로 더 알려져 있는 곳이다.


유당공원의 오래된 팽나무가 광양의 역사를 응축한 듯하다. 광양읍수는 1528년 광양읍성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한 숲이다.


유당공원의 여러 선정비 중 2개 안내문이 유독 크게 세워져 있다. 선정비의 주인공이 '일제 국권 침탈 협력자'였음을 알리고 있다.

오래된 나무 아래에는 광양현감과 전라관찰사 등 이 고을을 거쳐간 행정관리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비석 아래에 조그마하게 안내판을 세워 놓았는데, 마지막 두 인물의 안내판을 유독 크고 잘 보이도록 만들었다. 이름 앞에 ‘일제 국권 침탈 협력자’라는 수식이 도드라진다. 부끄러운 과거를 잊지 않고 역사 앞에 당당한 광양의 자존심을 보는 듯하다.

인근 광양예술창고도 광양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다. 2011년 경전선 광양역이 외곽으로 이설된 후 옛 역사 주변에 남아 있던 물류창고 2개 동을 개조한 시설로 하나는 여행자 쉼터 겸 북카페로, 또 하나는 광양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광양의 사계를 미디어아트로 소개하는 영상관도 볼거리지만, 이경모(1926~2001) 작가의 영상 사진전이 인상적이다. 광양읍수와 오일장뿐만 아니라 전국 주요 관광지와 장터의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이 원판을 인화한 형식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짧은 시간 큰 변화를 겪어온 대한민국의 풍경이 아련하게 흐른다. 광양와인동굴도 광양의 급격한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광양제철로 연결되던 폐선로 터널을 미디어아트 전시관으로 꾸몄다. 세계 각국의 와인을 맛보고, 와인 족욕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옛 광양역 물류창고를 개조한 광양예술창고.


광양예술창고에 이경모 작가의 사진이 영상으로 전시되고 있다.


광양와인동굴의 빛 장식.


오래된 한옥을 개조해 카페, 숙소, 전시관 등으로 활용하고 있는 인서리공원.


광양읍 인서리의 오래된 골목 담장.

읍내 중심의 인서리공원은 요즘 광양에서 뜨는 ‘핫플’이다. 실제 공원이 아니라 ‘인서리 01’번지에서 이름을 빌렸다. 오래된 한옥을 개조해 카페와 전시장, 숙소로 꾸민 시설로 골목골목에 광양의 정겨운 풍경이 남아 있다.

겨울이 와도 남도는 푸르다, 옥룡사지 동백숲

광양의 대표 먹거리를 꼽자면 단연 ‘광양불고기’다. 청동화로에 참숯을 피워 구리 석쇠에 구워내는데 ‘천하일미 마로화적’이라 일컬어진다. 서울에서 귀양 와 아이들 글공부를 도와준 선비에게 집주인이 대접한 음식에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마로’는 광양의 옛 지명이다. 맛의 비결은 얇게 썬 쇠고기를 집집마다 특색 있는 양념으로 살짝 버무린 데 있다. 양념에 푹 재운 다른 지역 불고기에 비하면 담백하다. 읍내 서천변에 광양불고기특화거리가 형성돼 있다.

광양불고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 백운산(1,218m) 자락에서 생산하는 숯이었다. 광양 사람들은 ‘앞문 열면 바다, 뒷문 열면 백운산’이라 할 정도로 백운산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성불계곡, 동곡계곡, 어치계곡, 금천계곡 등은 지역에서 유명한 피서지다.

광양의 대표 음식인 광양불고기. 금목서회관(식당)은 석쇠에서 빠르게 저으며 굽는 게 맛의 비결이라 말한다.


옥룡사지 동백숲 초입의 운암사. 겨울이라는 계절을 잊은 듯 주변에 푸르름이 가득하다.


운암사 담장에 피라칸타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백운산의 또 다른 자랑으로 옥룡사지 동백숲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한 옥룡사는 선승(禪僧)이자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알려진 선각국사 도선(827~898)이 35년간 머물다 입적한 사찰이다. 번성했던 사찰은 1878년 화재로 폐허가 되고 당시 심었다는 동백만이 무성하게 숲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꽃피는 시기가 애매해 규모와 운치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한다. 겨울 내내 꽃망울이 터지는 일반적인 동백과 달리 이곳 동백은 3월 말에서 4월 중순까지가 절정이다. 붉은 꽃송이가 바닥을 덮는 것도 그 무렵이다. 이때면 섬진강 매화는 이미 끝물이고, 벚꽃이 전국에 흐드러질 시기이니 옥룡사지 동백은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다.

탐방로는 주차장에서부터 근래에 세운 운암사라는 사찰까지 이어진다. 물론 반대로 걸어도 상관이 없다. 운암사로 들어서면 높이 40m 동양 최대 규모라는 청동약사여래불이 반긴다. 층층의 담장에는 관상수로 심은 피라칸타 열매가 빨갛게 주렁주렁 매달려 산새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공터로 남은 옥룡사지 주변에 검푸른 동백이 숲을 이루고 있다.


옥룡사지 동백숲엔 겨울이 없다. 사철 푸른 덩굴식물이 동백가지를 타고 오르고 있다.


옥룡사지 공터에 높이 자란 종가시나무 뒤로 동백숲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다.


검푸른 동백잎에 햇살이 부서져 눈이 부시게 반짝거린다.

전각 뒤로 돌면 바로 동백숲으로 이어지고, 조금 오르면 작은 공터에 선각국사비와 승탑이 세워져 있다. 옥룡사지 출토 유물을 고증해 2002년에 세운 탑비니 세월의 운치는 느껴지지 않는다. 고려 말 개성 국청사 뜰에 있던 탑비를 이곳으로 옮겼다 하는데, 행방이 묘연하고 영암 도갑사와 순천 선암사에 도선의 초상화가 전해지고 있다.

승탑에서 얕은 고개를 넘으면 텅 비어 있는 드넓은 절터가 나타난다. 돌멩이만 남은 양지바른 공터에 햇살이 부서지고, 동백숲이 아늑하게 감싸고 있다. 계절은 겨울로 접어드는데 가장자리에 우뚝 선 종가시나무도 산비탈의 동백숲도 온통 푸르다. 붉은 꽃송이 하나 없지만 한낮의 짧은 볕을 빨아들인 이파리가 눈이 부시게 반짝거린다.

옥룡사지 동백숲 산책로는 주차장에서 운암사까지 이어진다. 여유 있게 30분가량 걸린다.


옥룡사지의 종가시나무 도토리. 종가시나무도 사철 푸른 나무다.


도선은 곡성 태안사에서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이라는 혜철 스님의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말 없는 말과 법 없는 법, 문자나 언어에 갇히지 않으면 누구나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고승의 깨우침처럼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텅 빈 공간에 희열이 충만하다.

광양 바닷가에 윤동주의 추억이

섬진강 하구에서 하동과 마주 보고 있는 광양 진월면 망덕포구는 시를 품은 바다다. 한적한 해안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산책길 곳곳에 윤동주(1917~1945)의 시가 새겨져 있다. 간도에서 태어난 윤동주의 흔적이 남도 끝자락에 남아 있는 건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 덕분이다.

정병욱(1922~1982)은 연희전문학교 후배로 윤동주와 인연을 맺었다. 윤동주는 1941년 시집을 발간하려 했지만 한글과 민족 문화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하던 시기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해 일본으로 유학 가며 세 부의 원고 중 한 부를 정병욱에게 맡겼다.

광양 망덕포구의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에 윤동주 원고가 정병욱 모친이 보관하던 방식대로 전시돼 있다.


망덕포구 산책로 '별빛나길'에 윤동주와 정병욱의 우정을 보여주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정병욱은 1944년 징병으로 끌려가며 ‘동주나 내가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거든 이것을 연희전문학교로 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해 달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 아들의 부탁대로 모친은 윤동주의 원고를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마루 밑 항아리에 보관했다가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자 기쁜 마음으로 건넸다. 1948년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빛을 볼 수 있었던 과정이다. 윤동주 본인이 가져갔던 원고는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순절한 후 찾을 수 없었고, 출국 전 담당 교수에게 졸업 작품 형식으로 제출했던 원고 역시 행방이 묘연했다.

정병욱 가옥은 1925년 그의 부친이 양조장과 주택을 겸해 지은 건물이다. 현재 건물 내부에 유고시집과 함께 정병욱 모친이 보관한 방식으로 친필 원고 사본이 전시돼 있다. 윤동주가 원고를 맡기면서 쓴 ‘정병욱 형 앞에’란 글귀가 눈에 띈다. 학교 2년 후배이자 다섯 살이나 아래인 정병욱에게 그는 정중하게 ‘형’이라 칭했다. 손아래뻘이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존중하던 당시 문학계의 멋스러움과 둘 사이 돈독한 우정이 읽힌다.

윤동주는 다섯 살 아래인 정병욱에게 원고를 맡기며 '정병욱 형 앞에'라고 썼다.


망덕포구 앞 조그마한 섬 배알도까지 두 곳에서 해상 산책로가 연결돼 있다.


망덕포구 앞 배알도는 아기자기한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전남 광양 여행 지도. 그래픽=김문중 선임기자


망덕포구 산책로 ‘별빛나길’에서 바로 앞 작은 섬 배알도까지는 해상교량으로 연결돼 있다. 산책로는 섬을 거쳐 맞은편 수변공원까지 다시 비슷한 길이의 다리로 이어진다. 천자를 배알하는 모양이어서 그렇게 부른다는데, 작은 섬 전체가 아담한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광양=글·사진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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