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성향' 소장 아래 비교적 진취적 결정
낙태죄 헌법불합치 등 위헌성 결정 파급
헌정사 첫 탄핵심판… 정치의 사법화 파랑
"국민과 역사의 평가를 겸허하게 기다리겠습니다."
유남석(66·사법연수원 13기) 제7대 헌법재판소장이 6년의 임기(재판관 10개월+소장 5년 2개월)를 마치고 이달 10일 퇴임식에서 남긴 말이다.
역사는 과연 '유남석의 7기 헌재'를 어떻게 평가할까. 보수 쪽에 주로 치우쳐 있던 과거 헌재와 달리, 우리법연구회 출신에 진보 성향으로 꼽혔던 유 전 소장 체제에선 변화하는 사회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진취적 헌법 해석이 다수 나왔다. 낙태가 더 이상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고, 양심적 병역거부 대체복무를 병역 제도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 모두 유 전 소장이 헌재에 몸담고 있던 시절 나온 성과다. 그러나 정치적 폭발성을 지닌 탄핵이나 권한쟁의심판 등이 헌재로 물밀듯 몰려오면서, 헌재가 정치적 사안의 중심에서 논란이 된 한계도 분명히 가진다.
유 전 소장이 헌재 수장에 오른 2018년 9월 21일부터 퇴임까지 전원재판부에서 선고된 건수는 총 2,676건이다. 이 중 위헌법률·헌법소원·권한쟁의심판 등에서 위헌성을 확인한 건은 112건, 헌법불합치 결정한 건은 65건이었다.
진보 쪽으로 몇 발짝 나아간 유남석 헌재
유 전 소장 재임 기간 내려진 전향적 결정 중 가장 사회적 이목을 끌었던 것은 2019년 4월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다. 여성의 자기결정권 행사를 존중한 이 결정은 여성계의 환영과 종교계 등 반발을 동시에 불렀다. '낙태한 여성에게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린다'는 낙태죄 조항은 2021년부터 효력을 잃었다. 당시 4(헌법불합치)대 3(위헌)대 2(합헌)로 내려진 결정에서 유 전 소장은 헌법불합치 의견을 냈다.
2018년 6월 헌재가 대체복무(군인이 아닌 사회서비스 요원 등에 종사해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를 마련하지 않은 병역법 조항이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고 판단한 것도 기념비적인 결정이었다. 이 결정 이후 정부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군 복무를 강제하는 대신, 3년간 교도소에서 의무 복무를 하도록 하는 대체복무제를 마련했다. 최근 3년의 복무를 마친 첫 사례가 나오는 등 대체복무는 제도적으로 확립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헌재 결정 이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1년 6개월'이라는 정찰제 형량을 받은 뒤 평생을 전과자로 살아야 했으나, 지금은 사회적 공헌을 하면서도 자신의 양심을 지킬 수 있게 됐다.
이밖에도 파급력 큰 위헌·헌법불합치 결정이 유남석 체제에서 나왔다. △교원의 그 밖의 정치단체 가입 금지(위헌 6대 합헌 3) △수사기관 통신자료 제공요청(전원일치 헌법불합치) △음주운전 처벌 기준을 강화한 윤창호법(위헌 7대 합헌 2)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 영상녹화진술 증거능력(위헌 6대 합헌 3) △국회의사당·법원·대통령 관저·국회의장 공관 인근 집회 금지(전원일치 헌법불합치) △국회 정보위원회 회의 비공개(위헌 7대 합헌 2) △강제퇴거 외국인 무기한 수용(헌법불합치 6대 합헌 3) △대북전단금지법(위헌 7대 합헌 2) 등이 그 예다.
다만 헌법재판관들의 의견이 극명히 갈려, 위헌 의견이 많았음에도 정족수(6명) 부족으로 합헌이 난 경우도 많았다. △국기모독죄(위헌 5대 합헌 4) △공수처법 삼권분립 위배(합헌 5대 위헌 3대 각하 1) △8촌 이내 혼인 금지(합헌 5대 위헌 4, 결혼 무효는 전원일치 헌법불합치) △국가보안법 이적표현물 소지·취득 처벌(위헌 5대 합헌 4) △동성군인 간 성행위 처벌 군형법(합헌 5대 위헌 4) △에이즈예방법상 전파 처벌(위헌 5대 합헌 4) 등이 거론된다.
정치갈등 파장이 헌재로 튀었다
국회가 갈등 해결 기구로 작동하지 못하면서, 헌재가 헌정사상 첫 법관·장관 탄핵심판의 부담을 짊어지는 상황도 유남석 체제에서 발생했다.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된 임성근 전 부산고법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심판은 5(각하)대 3(인용) 의견으로 각하됐다. 이미 임기만료 퇴직해 법관직을 상실했다는 취지였다. 당시 유 전 소장 등은 "재판의 독립과 공정성에 대한 국민 신뢰를 현저히 훼손해 상응하는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다"며 인용 의견을 냈다. '이태원 참사' 관련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탄핵심판은 "헌법상 의무를 위반했다고까지 보긴 어렵다"는 이유로 전원일치 기각됐다.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 관련 국민의힘과 법무부가 제기한 권한쟁의심판에선 모든 쟁점에서 재판관들이 5대 4로 갈리는 모습을 보였다.
헌재 사정을 잘 아는 법조계 관계자는 "정치적으로 해결돼야 할 사건들이 자꾸 헌재로 넘어오면서 정치의 사법화 현장에서 피해를 고스란히 받았다"며 "탄핵심판, 권한쟁의심판은 헌재 인력이 많이 투입돼 심리 부담이 컸다"고 전했다.
굵직한 위헌·헌법불합치 결정이나 탄핵만큼 여론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헌재가 대법원 판결을 취소하면서 양대 헌법기관 간에 긴장관계가 형성되는 일도 있었다. 헌재의 한정위헌(법 조항 자체가 위헌은 아니나 범위를 벗어난 해석에 대한 위헌 판단) 결정을 둘러싼 갈등이다. 지난해 헌재는 제주도 위촉직 심의위원 뇌물 사건과 GS칼텍스 등의 구 조세감면규제법 관련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재심 기각 판결을 연이어 취소했다.
헌재의 대법원 재판 취소는 1997년 이길범 전 국회의원의 과세취소 소송 이후 25년 만의 일이었다. 대법원은 "한정위헌 결정은 법원을 기속할 수 없고 재심 사유가 될 수 없다"며 수용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법률 해석 권한은 법원에 있다는 것이다. 이 갈등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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