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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 진단 후 윤도현과 '중꺾마'…"투병 중 지구의 마지막 담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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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 진단 후 윤도현과 '중꺾마'…"투병 중 지구의 마지막 담았죠"

입력
2023.11.21 04:30
수정
2023.11.21 07:5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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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위기 쫓은 '지구 위 블랙박스' 구민정 오효정 PD
제주부터 남극까지... 강릉 안인사구는 해수면 상승으로 생계 위협
사회적 약자부터 덮친 기후 재난
투병하던 윤도현 등 서로 챙기며... "많은 스태프와 출연자가 몰두, 끝까지 마무리하고 싶었다"

기후 위기를 다룬 KBS '지구 위 블랙박스'를 만든 오효정(왼쪽) 프리랜서 PD와 구민정 KBS PD. 최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 카페에서 만난 두 PD가 프로그램 제작 뒷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윤서영 인턴기자

기후 위기를 다룬 KBS '지구 위 블랙박스'를 만든 오효정(왼쪽) 프리랜서 PD와 구민정 KBS PD. 최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 카페에서 만난 두 PD가 프로그램 제작 뒷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윤서영 인턴기자

지난 6월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 병원 응급실을 찾아갔다. KBS '지구 위 블랙박스'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던 오효정(32) PD는 위암 진단을 받았다.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오 PD는 "('지구 위 블랙박스' 투입 전) 종종 쓰러졌는데 그땐 일이 너무 힘드니까 '체력이 떨어져 그렇겠지' 생각하고 넘겼다"며 "그런데 암 선고를 받으니 '멘붕'이었다"고 말했다.

오 PD는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지구 위 블랙박스' 후반 작업을 마쳤다. 주위에선 모두 그만두라고 했지만 그는 일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오 PD는 "많은 스태프와 출연자가 기후 위기를 알리기 위해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끝까지 같이 마무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1화 대본을 보고 먼저 든 생각은 "(후세대를 살아갈) 아이들은 어떡하지?"였다. '이태원 클라쓰'(2020) '경성크리처'(12월 공개) 등의 제작에 참여해 소위 잘나가는 드라마 PD로 업계에서 '몸값'이 치솟을 때 갑자기 환경 프로그램 제작에 뛰어든 배경이었다.

윤도현이 '지구 위 블랙박스'에서 물이 찬 수조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기후 위기로 해수면이 오른 상황을 표현했다. 공연 장소는 동해다. KBS 방송 캡처

윤도현이 '지구 위 블랙박스'에서 물이 찬 수조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기후 위기로 해수면이 오른 상황을 표현했다. 공연 장소는 동해다. KBS 방송 캡처


윤도현 희소암 고백 후

오 PD가 휘청일 때 동료들은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그는 "윤도현 선배가 제 투병 소식을 듣고 '나도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면서 '같이 잘 이겨내자'라고 해줬고 따로 연락해 틈틈이 제 상태를 살폈다"며 "투병 중에도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윤도현 선배를 보고 '나도 이겨낼 수 있겠네'란 생각의 전환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때 윤도현도 희소암(위말트 림프종)을 앓고 있었다. 제작진이 윤도현의 투병 사실을 안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 후 오 PD는 해수면이 점점 차오르는 동해로 가 윤도현과 함께 찍은 '흰수염고래' 영상을 지난달 진행된 시사회에서 보고 결국 눈물을 쏟았다.

'지구 위 블랙박스' 속 거주 불능 선포된 지구에 남아있는 유일한 지구인 윤(김신록). KBS 방송 캡처

'지구 위 블랙박스' 속 거주 불능 선포된 지구에 남아있는 유일한 지구인 윤(김신록). KBS 방송 캡처


'지구 위 블랙박스' 한 장면. KBS 방송 캡처

'지구 위 블랙박스' 한 장면. KBS 방송 캡처


오 PD와 '지구 위 블랙박스'를 기획하고 제작을 총괄한 구민정(34) KBS PD를 최근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함께 만났다. 두 PD는 모험의 단짝이었다. 자연 훼손의 실태를 화면으로 고스란히 보여주고 시청자에 가르치듯 온갖 정보를 나열해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환경 프로그램이 거의 전부일 때, 두 PD는 드라마와 음악 예능의 방식으로 다른 길을 갔다.

구 PD는 틀에 박힌 환경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기 위해 방송사 밖에서 수소문해 드라마를 만들던 오 PD를 섭외했다. '지구 위 블랙박스'는 거주 불능이 선포된 2049년을 배경으로 지구의 블랙박스 센터에 홀로 남아 방공호 캡슐에 잠들어 있는 딸을 생각하는 윤(김신록)의 이야기로 드라마처럼 시작한다.

가수 김윤아가 가뭄으로 물이 바닥을 드러낸 저수지에서 노래하고 있다. KBS 방송 캡처

가수 김윤아가 가뭄으로 물이 바닥을 드러낸 저수지에서 노래하고 있다. KBS 방송 캡처


가뭄으로 바닥이 쩍 갈라진 스페인 저수지에서 댄서 모니카와 립제이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KBS 방송 캡처

가뭄으로 바닥이 쩍 갈라진 스페인 저수지에서 댄서 모니카와 립제이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KBS 방송 캡처

'천 개의 파랑'으로 유명한 천선란 공상과학(SF) 작가가 쓴 이야기를 토대로 새우양식 등으로 파괴된 '지구의 허파' 태국의 맹그로브숲 강 한가운데 띄워진 뗏목에서 정재형은 애달프게 피아노를 연주한다. 아이돌그룹 르세라핌은 하얗게 바싹 말라 죽은 나무들로 초록을 잃어가는 한라산에서 공연했다. 시청률은 높지 않았지만 프로그램은 시나브로 입소문을 탔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저 소중한 풍경이 제발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해졌다'는 글들이 올라왔고, 해외 K팝 팬들은 영상을 공유하며 기후 위기 문제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구 PD는 "방송을 본 중3 학생이 온라인에 '이제 제가 뭘 하면 되죠?'란 글을 남겼더라"며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이런 프로그램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연락을 진짜 너무 많이 받았다"고 놀라워했다.

록밴드 잔나비 최정훈이 기후위기로 빙산이 녹아내리고 있는 남극에서 노래하고 있다. '지구 위 블랙박스'

록밴드 잔나비 최정훈이 기후위기로 빙산이 녹아내리고 있는 남극에서 노래하고 있다. '지구 위 블랙박스'


'지구 위 블랙박스' 제작에 참여한 오효정 프리랜서 PD가 제작 뒷얘기를 말하며 웃고 있다. 윤서영 인턴기자

'지구 위 블랙박스' 제작에 참여한 오효정 프리랜서 PD가 제작 뒷얘기를 말하며 웃고 있다. 윤서영 인턴기자


최남단 도시서 반복된 격리, 네 번의 촬영 취소

제작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결항, 격리 그리고 다시 결항. 인천에서 미국 애틀랜타와 칠레 산티아고를 거쳐 세계 최남단 도시 푼타아레나스에서 출발한 남극행은 변덕스러운 날씨로 번번이 무산됐다. 구 PD는 "코로나19로 남극에 무균 상태로 들어가야 해서 푼타아레나스에서 격리(5일)를 마치고 남극으로 들어가려는 데 막상 공항까지 갔는데도 날씨가 갑자기 안 좋아져 다시 숙소로 돌아와야 하는 일이 반복됐다"며 "'다 접고 돌아와야 하나' '북극에라도 가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동해 한가운데 있는 한국해상풍력실증단지에서 이뤄진 밴드 YB의 '나는 나비' 촬영도 네 번이나 연기됐다. 오 PD는 "YB가 대기하다가 날씨가 갑자기 너무 안 좋아져 촬영 못 하고 돌아간 적도 있다"며 "배로 기타와 드럼 등 악기를 실어 날라야 하고 소수의 스태프만 그 배에 탈 수 있다 보니 밴드 멤버들이 직접 악기를 다 옮겨 연주했다"고 말했다. '지구 위 블랙박스'는 이런 과정을 거쳐 약 500일 동안 제작됐다. 평소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가수 김윤아와 배우 고경표, 박병은 등이 팔을 걷고 나서 제작에 힘을 보탰다.

구상나무가 집단 고사하고 있는 제주의 산에서 공연하고 있는 그룹 르세라핌. KBS 방송 캡처

구상나무가 집단 고사하고 있는 제주의 산에서 공연하고 있는 그룹 르세라핌. KBS 방송 캡처


구민정 PD는 "스페인에서 촬영을 위해 차를 타고 달린 거리만 5,000km"라고 말했다. 윤서영 인턴기자

구민정 PD는 "스페인에서 촬영을 위해 차를 타고 달린 거리만 5,000km"라고 말했다. 윤서영 인턴기자


"집 휩쓸려갈까 불안해하면서" 동해의 고통

어렵게 카메라에 담긴 자연 파괴의 실상은 처참했다. 기후 재난은 사회적 약자부터 덮쳤다. 해수면 상승으로 강릉 안인사구 길 일부는 뚝 끊겼다. 해안 침식이 심해 해변은 출입이 금지됐다. 인근 주민들은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모두 최근 1, 2년 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었다. 오 PD는 "(백사장 침식으로) 피서객들이 안 오니 주민들이 먹고살기가 힘들어졌다"며 "집이 휩쓸려갈 수도 있다고 불안해하면서 살고 있어 너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구 PD는 "도시에서만 살다 보니 자연이 어떻게 변해가고 뭐가 잘못돼가는지 몰랐고 느끼지 못했다"며 "맹그로브숲을 가보니 벌써 50%가 파괴됐더라"고 말했다.

"뉴스를 통해 사막 지역에서 우박이 떨어졌다는 먼 나라 얘기는 종종 들었지만 촬영하면서 우리나라도 날씨가 이렇게 변덕스럽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어요. 모든 촬영이 기후 위기의 영향을 받으면서 진행됐어요. 제작 슬로건은 '마주할 결심'이었어요.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라도 많은 분이 이 현실을 마주해 주셨으면 좋겠어요."(구 PD)

"처음 제작 제의 왔을 땐 고사했어요. 용기가 나지 않았거든요. 미술, 촬영 감독님 등 여러 스태프가 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어요. 다들 너무 진심이었고요. 촬영하면서도 위로도 받고 많이 배웠습니다."(오 PD)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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