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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낭, 하나둘 사라지는 슬픈 풍경

입력
2023.11.16 22: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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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페낭. ⓒ게티이미지뱅크

말레이시아 페낭. ⓒ게티이미지뱅크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등바등 치열했던 한 해의 끝이 쓸쓸하게 쌓여간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어르신들 부고도 늘어난다. 뚝 떨어진 기온을 한 해 더 견디지 못할 만큼 슬프게도 낡은 혈관. 나이 든 부모와 사는 이는 늙은 잠자리의 단골손님인 '잠꼬대 비명'에도 순간 가슴이 철렁한다.

건장했던 부모의 낡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자식의 마음으로 들르는 도시가 있다. 세계 물류의 5분의 1 이상이 오가는 해협의 길목이라 바다를 넘나드는 해적들도, 아시아를 집어삼키려던 영국도 제일 먼저 탐냈던 도시. 18세기 영국 식민지 시대의 유산에 이슬람 상인들이 독특한 색깔을 더하고 중국 무역상들이 성공을 과시하며 지은 저택과 노동자들이 땅 한 뼘 없이 바다에 지은 판자촌이 동시대에 공존하던 도시, 말레이시아의 페낭(Penang)이다.

해협으로 바로 드나드는 바닷가에는 세계로 돈이 오갈 은행이 늘어섰고, 식민지에서 양껏 끌어모은 물건을 가져갈 항구에는 짐을 지고 옮길 일꾼이 필요했다. 험한 짐꾼 일도 밀어주고 끌어주는 고향 사람이 없으면 발도 못 붙이던 시절. 땅도 없고 집도 없는 초기 이민자들은 나무 기둥을 얼기설기 박아 만든 간이선착장에 판자로 방을 덧붙여 만들고는 모여 살았다.

고된 노동자의 배를 채워주는 건 거리에서 음식을 만드는 상인들이었다. 일하다가 뚝딱 먹을 수 있는 한 그릇 음식이 주였는데, 인도계 이민자에게는 커리와 반찬을 바구니에 넣고 다니며 쌀밥에 얹어주는 '나시 칸다르'가, 중국계 이민자에게는 불향 가득 입힌 볶음국수나 더운 국물을 부은 '완탕면'이 인기였다. 인도와 중국에서 먹던 음식에 말레이 양념이 더해지고, 말레이 전통음식에도 이국적인 향신료가 섞이면서 세상 어디에도 없는 혼종 요리들이 탄생했다.

말레이시아 페낭. ⓒ게티이미지뱅크

말레이시아 페낭. ⓒ게티이미지뱅크

수십 년째 같은 자리에서 팬을 놀리며 맛있는 냄새를 피워내는 할아버지. 무심한 표정으로 툭툭 썰어낸 고명을 얹어 뚝딱 말아주는 뜨끈한 국수. 대를 이어가며 찾아오는 단골들에게 건네는 한 그릇 속에서 페낭의 역사는 진행형이었다. 이렇게 저마다 비장의 비법을 선보이는 노포들은 페낭을 말레이시아의 음식 수도, 아시아 최고의 미식 도시로 만들었다.

그렇게 페낭을 아끼며 드나든 지 수십 번, 언젠가부터 할머니에서 손자로 이어지며 현지인의 사랑을 듬뿍 받던 식당이 쓱 사라지는 일이 잦아졌다. 단돈 1,000원에 온갖 세월의 노하우가 응축된 커리 국수를 말아주던 할아버지가 많이 아프시다는 소식도 들렸다. 경탄을 불러일으킬 만한 가게를 새로 발견해도, 다음에 또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구시가의 버려졌던 건물에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불어넣은 청년들은 사람이 몰려들자 덩달아 월세가 올라 밀려났다. 비싼 월세와는 상관없이 새로 형성된 상권을 차지하려는 지갑 두둑한 자본가들만 가게를 얻어 특색도 없는 식당을 낸다. 저렴한 월세 덕에 최강의 가성비로 음식을 팔던 노포들은 한번 밀려나면 다시는 그 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수백 년 된 전통 가옥들을 감각적 벽화로 되살려내 긴급 소생을 이루었던 구시가,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에 모던한 가구가 오묘한 조화를 이루며 뜨끈한 피가 돌던 페낭의 조지타운. 늙은 도시는 반짝 살아났다가 다시 죽어간다. 한 도시의 사라져가는 이야기들이, 나무에서 스러지는 생기가 유난히 안타까운 계절이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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