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치는 환치기]
관세청 환전소 점검 현장 동행
4000달러 이상 환전해 주거나
가상화폐 이용 '환치기'도 횡행
"범죄 자금 유출 통로로 이용"
지난달 27일 서울 지하철 2호선 대림역 12번 출구로 나오자 중국어 간판을 내건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거리가 나왔다. 약 50m 간격으로 들어선 환전소에는 달러와 엔화, 위안화 환율판과 함께 한글 문구가 빨간 글씨로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보이스피싱 조심, 의심 시 즉시 신고.’ 한 달 전 세관당국의 일제 단속을 의식한 듯 이날 방문한 10곳의 환전소에선 “송금은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불법 송금’ 씨앗은 여전했다. 이들 중 한 곳에선 신분증을 확인한 뒤 중국어로 “어디에서 왔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급히 돈을 보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자, 환전소 직원이 답했다. “급한 건이에요? 지금은 안 되고, 이따가 사장님 오면 다시 이야기해 보시죠.” 범죄 자금 세탁에 이용되는 해외 송금 등 불법 행위를 하지 말자는 빨간 경고문이 무색할 정도였다. 환전소가 돈을 해외로 보내거나 해외에서 돈을 받는 건 위법이다.
코로나19 종식 이후 외국인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사설 환전소의 ‘불법 행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범죄 자금을 외국으로 빼돌리려다 적발된 사례도 늘면서 환전소가 불법 자금세탁의 창구로 전락했다는 우려마저 커지고 있다.
고액 수수료를 챙길 수 있는 불법 송금은 ‘달콤한 유혹’이다. 지난해 등록 취소당한 대림역 소재 A환전소가 그런 경우다. 환전소를 운영하던 B씨는 2021년 1월 폐지 신고 후 지인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워 환전영업자 신규 등록을 했다. 지인의 실거주지(제주)와 사업장 간 거리가 상당하다는 점을 수상히 여긴 관세당국이 불시 점검에 나선 결과, B씨가 불법 자금 송금 대행으로 적발돼 폐지 신고 후 지인 명의로 허위 등록, 환전업을 계속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나준호 관세청 외환조사과 관세행정관은 “어떤 돈인지 묻지 않고, 세관 신고 없이 빠르게 돈을 옮길 수 있어 범죄 수익이 해외로 빠져나갈 때 환전소를 거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달러 쪼개기’로 외국환거래 규정을 어기며 환전 업무를 보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같은 날 동일 고객에게 4,000달러 이상 바꿔주는 게 불가능하지만, 회당 환전액을 4,000달러 아래로 맞춰 여러 번 나눠 바꿔 주면 당장은 법망을 피해 갈 수 있다는 허점을 노린 것이다.
이날 서울 마포구 소재 한 환전소는 ‘통 큰 거래’로 경고 처분을 받았다. 지난해 8월부터 올해 5월까지 외국인 5명에게 3,596만8,000원(약 2만6,600달러)의 외화를 매각한 탓이다. 1만 달러 이상을 원화로 바꿔줄 때는 관세청과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신고해야 하지만, 해당 환전소는 시행하지 않았다. 경고 조치가 적힌 ‘환전영업자 검사 결과 통지서’를 건넨 박동철 관세청 서울세관 외환조사과 팀장이 “다음에 또 이러면 영업정지 처분을 받을 수 있다”고 하자, 환전소 직원은 “주의하겠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실제 환전 거래와 다르게 허위 기재 후 관세청에 보고하는 것도 범죄 자금 세탁에 악용되는 방법이다. 이번 일제 단속 땐 미국에 체류 중인 사람이 대림동 환전소에서 돈을 바꿨다고 신고한 경우가 적발됐다. 환전영업자는 환전 금액에 관계없이 이름‧주민등록번호‧여권번호 등 고객 인적사항을 환전장부에 기록하고, 반기별로 해당 사본을 관세청에 제출해야 한다.
법망을 피해 가는 거래 수법은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최근엔 가상화폐를 이용한 환치기가 성행하고 있다. 해외에서 의뢰인에게 받은 현지 화폐로 가상화폐를 사들인 뒤 국내 거래소에서 팔아 현금을 전달하는 식이다. 박 팀장은 “외국인은 국내 가상화폐거래소에서 계정을 만들 수 없어 환전소 명의 계정을 거점으로 이용한다”며 “중국에선 가상자산 거래가 금지돼 있기 때문에 홍콩 거래소를 통해 국내로 가상화폐가 들어오고 이를 현금화하는 사례가 적발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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