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집 피해 한국 입국한 러시아인들
난민여부 다투며 공항대기실 장기 체류
평상 취침, 빵·음료수 제공... 시설 열악
영화 '터미널'의 주인공 빅터 나보스키(톰 행크스)는 미국 뉴욕 JFK 공항에서 9개월간 노숙생활을 한다. 비행 도중 쿠데타로 고국이 사라져 입국이 거부된 탓에 공항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쓰레기통을 뒤져 끼니를 해결하는 등 공항 노숙은 고된 일상의 연속이었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 영화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국내에서도 난민인정 여부를 다투는 외국인들이 사법기관의 판단이 나올 때까지 공항 출입국대기실에서 장기체류를 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정부가 이들의 노숙 생활을 방치하는 건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고 봤다.
인권위는 지난달 20일 국회의장과 법무부 장관,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 청장 등에게 출국대기실에서 장기간 거주할 수밖에 없는 송환대상 외국인들을 위해 공항 밖 대기실 설치 등 관련 규정을 마련하고 주거환경 처우를 개선할 것을 권고했다고 30일 밝혔다.
인권위에 따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강제 징집명령을 거부한 러시아인 5명은 지난해 10월 한국에 입국했다. 이들은 난민심사를 신청했지만 법무부는 "단순 병역기피는 난민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심사에 회부하지 않았다. 이에 반발해 5명 중 3명이 출입국청장을 상대로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냈고, 올해 2월 법원이 2명에게 승소 판결을 내리면서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법원 판단을 기다리는 동안 이들은 공항 출입국대기실에서 3개월 이상 장기투숙했는데, 시설은 열악했다. 남녀로 구분된 대기실에는 침대 대신 평상이 설치됐고, 오후 10시 일괄 소등을 했다. 아침과 저녁식사도 빵과 음료수뿐이었다. 냉장고 사용 역시 불가했으며 칫솔조차 제공되지 않았다.
공항 출입국 당국은 출입국대기실이 출국 전 대기하면서 숙식 등 기본 편의를 제공하는 시설인 만큼 소송 등 절차로 장기 대기 중인 외국인에게 필요한 모든 물품을 지급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인권위 판단은 달랐다. 인권위는 "출국대기실은 사람이 장기간 머무르기에 식사, 수면 공간, 운동, 의료 등 측면에서 헌법 제10조에 명시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할 소지가 크다"며 "송환 대상 외국인이 인간으로서 존엄이 보장될 수 있도록 별도 시설과 운영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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