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출판 계약 관행으로 창작물 지키고
작가 권리 신장 위해 뭉친 '작가노조 준비위'
넷플릭스와 월트디즈니 등 거대 제작사가 5개월이나 멈춰 섰다. 일종의 '작가노조'인 미국작가조합(WGA)이 작가 처우 개선과 보수 문제 등을 요구하며 사용자 단체인 영화·TV 제작자 연합(AMPTP)을 상대로 파업을 시작하면서다. 이 파업으로 할리우드에서 영화 등 제작 작업 대부분이 중단됐다. 1933년 영화 작가 조합에 뿌리를 두고 1954년 창설된 이 연대체는 명실상부 작가들의 '노동조합'으로 존재하며 자본과 권력 앞에서 작가들의 권리를 지키고 넓히는 데 앞장섰다.
미국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에서 개별 '작가'들이 놓인 처지는 바람 앞의 촛불과 같다.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을 수상한 백희나 작가는 그림책 '구름빵'의 저작권 문제로 출판사와 분쟁을 벌였으나 패소했다. 지난 3월 인기 만화 '검정고무신'의 원작자인 이우영 작가는 출판·제작사와 수년간 불공정 계약과 연관된 재판에 휘말리면서 결국 세상을 등졌다. 베스트셀러 작가도 이럴진대, 신인이나 무명작가들이 놓인 불합리한 처지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작가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창작물을 지키고 공정한 출판 계약 관행을 이끌며 궁극적으로 작가들의 권리와 처우를 지키는 '작가노조'를 만들기 위해서다. 사회과학, 시, 소설, SF, 르포, 인문, 번역, 웹소설 등 장르를 불문하고 스스로 '집필 노동자'라는 생각으로 모인 작가들이 작가노조 준비위원회를 띄웠다. 준비위는 지난 9월 첫 집담회를 시작으로 함께할 작가들을 모으고, 노조의 기틀을 잡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중 안명희(49), 박애진(46), 윤영(필명·28), 희음(필명) 등 4명의 작가를 27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작가들은 쉽게 돈을 떼이고, 종종 불합리한 요구를 받아들이고야 만다.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출판사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과학소설 작가인 박애진씨는 지급받아야 하는 원고료를 받지 못해 출판사와 다투기 위해 노동청에 간 적이 있다. 노동청 직원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 말.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았기에 노동자가 아니에요." 결국 경찰서에 고소를 하는 등 일을 키우고 나서야 출판사로부터 200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출판사의 불합리한 요구에 목구멍이 포도청인 작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전업이 아니거나 생계 수단이 있는 작가는 안 싸울 수 있겠지만, 출판사보다 작가가 훨씬 많은 현실에서는 개개인이 불합리를 타개해 나가야 하는 거죠."
시를 쓰는 희음씨도 겪었던 어려움을 토로했다. 자신이 등단한 문예지는 그에게 무임금으로 교정 교열 업무를 맡겼는데, 힘이 없는 신인작가로서는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한번 찍히면 암암리에 문단에서 활동할 수 없다는 걸 많이 느꼈는데, 출판계에도 그런 두려움이 있는 것 같아요. 일단은 참았다가 유명해지면 목소리를 낼 것이라며 차일피일 미루는 속에 또 다른 작가들이 피해를 입고요."
정보통신(IT) 플랫폼이 막강한 지배력을 갖는 웹툰·웹소설계는 기존 출판계의 구습에 더해 거대 플랫폼 자본 권력까지 상대해야 하는 실정이다. 웹소설 작가 윤영씨는 "작가가 많은 수고와 노동으로 만들어 내는 창작물임에도 플랫폼이 선인세 개념인 '미니멈 개런티(MG)'를 투자했다는 이유로 작가는 한 편당 수익이 40원이 채 되지 않고 플랫폼이 과한 비율을 가져간다"며 "종이책으로 만드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많이 떼이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작가들이 놓인 처지가 워낙 다양하기에 준비위가 다룰 의제도 좀처럼 간단히 요약되긴 어렵다. 왜 작가들의 인세는 통상 10%로 고정되어 있는가. 왜 일부 출판사들은 정산을 투명하게 제때 하지 않아 작가들이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게 만들까. 왜 출판사는 창작물에 대한 2차 저작권까지 표준계약서로 요구하나. 몇 부가 팔렸고 또 몇 부를 새로 찍었는지를 정확히 알려주는 유통 시스템은 왜 없는가. 그리고 이런 질문은 '집필 노동'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집필 노동은 왜 노동이 아니란 말인가. 최저 임금은 있는데 창작과 글에 대한 최저선은 왜 없는가. 작가를 착취하여 이득을 보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등.
앞으로 노조가 되기 위해 놓인 법적·제도적 과제도 하나같이 쉽지 않은 것들이다. 우선 프리랜서처럼 개별적으로 노동하는 작가들의 근로자성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영화배우조합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영화배우조합은 지난 7월 총회를 열고 설립신고를 마쳤으나, 당국은 배우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조합의 설립필증을 교부하지 않고 있다. 각고의 단계를 뛰어넘어 노조로 인정받는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누구와 교섭할 것인가. 개별 출판사인가, 출판인들의 협회인가 혹은 IT 플랫폼인가. 파업을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WGA 같은 파업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작가들은 '상상력'으로 무장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우선 많은 작가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눌수록, 보이지 않는 형태의 작가들의 노동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또 다양한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라 믿는다. 준비위를 이끄는 안명희 작가는 "지금은 당장의 계획을 말하기보다 노조의 내용을 채우는 데 주력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WGA로 인해) 할리우드는 멈췄지만, 우리는 이 시스템을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생각해요. 하지만 작가들이 모였잖아요. 우리는 모든 상상을 할 수 있고, 법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작가노조가 정식으로 설립되는 그날까지 우리에게 맞는 노조, 활동, 파업에 대해 논의해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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