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유네스코 세계유산
편집자주
느린 만큼 보이는 사람, 마을, 자연. 매주 수요일 여행 감성을 자극하는 풍경을 찾아갑니다.
고창읍성 주차장 관광안내소에 ‘세계유산도시’라는 팻말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다. 문화적·생태적 가치가 높아 잘 보존해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자산으로 인증받은 유산이 전국에 여럿이지만, 제주를 제외하면 전북 고창만큼 밀집된 곳이 없다. 2000년 고창 고인돌이 강화·화순고인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고, 2013년에는 고창군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으로 선정됐다. 2021년에는 고창갯벌이 서천·신안·보성순천갯벌과 함께 ‘한국의 갯벌’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람사르습지에 등재됐고, 올해는 고창과 부안을 중심으로 한 전북권 국가지질공원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새로 이름을 올렸다. 명실상부 유네스코 4관왕 도시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운곡습지와 고인돌공원
고창에서 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으로 첫손에 꼽는 곳은 운곡습지다. 람사르습지에도 등재된 운곡습지는 과거 주민들이 계단식 논으로 이용하던 곳이었지만, 1980년대 초 영광원자력발전소에 냉각수를 공급하기 위해 마을 아래에 댐을 건설하면서 40년 가까이 폐경지로 유지되고 있다. 인간의 간섭이 사라지자 자연은 스스로 생명력을 회복해 현재 원시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중이다. 수량이 풍부하고 오염원이 없는 깨끗한 습지에는 좁은 덱 탐방로만 개설돼 있다.
탐방로는 아산면 용계리 탐방안내소에서부터 고창읍 죽림리 탐방안내소까지 이어진다. 어느 쪽에서 출발해도 상관이 없고 일부만 둘러봐도 되지만, 원시림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만끽하자면 전체 코스를 탐방할 것을 추천한다.
용계리 탐방안내소에서 출발하면 절반은 전기차(수달열차)로 운곡저수지를 따라 이동하고, 나머지 구간은 걸어서 습지를 통과하고 죽림리 탐방안내소로 나온다. 용계리 탐방안내소에서 수달열차(2,000원)에 오르면 저수지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천천히 이동하며 운곡습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듣는다. 길가에 자란 은사시나무와 대나무 가지 사이로 푸른 호수에 햇살이 반짝인다. 운곡저수지에는 주변 다섯 개 계곡물이 흘러든다. ‘오방골’ 혹은 ‘오베이골’이라 불리던 골짜기에는 한때 1개 사찰을 비롯해 9개 자연 부락이 있었고, 160여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수달열차 종점에서부터는 호수 맞은편으로 난 탐방로를 걸어 계곡으로 들어간다. 계곡물이 저수지로 흘러드는 지점부터 원시의 늪이다. 물을 대던 수로는 농경지와 경계가 희미해졌고,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형성돼 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돌돌돌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덱 탐방로로 접어들면 본격적으로 원시림이다. 제멋대로 자라 얽히고설킨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간간이 햇볕이 부서진다. 문명의 소음은 모두 사라지고 맑은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만 가득하다. 습지에는 확인된 보호 야생동물만 해도 수두룩하게 서식하고 있다.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 1급 수달과 황새가 있고, 2급 삵과 구렁이, 새호리기, 팔색조도 살고 있다. 붉은배새매와 황조롱이는 천연기념물로 보호하는 조류다.
키버들, 수양버들이 많지만 습지에 버드나무 군락만 있는 건 아니다. 갈참나무 밤나무 서어나무도 무성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고, 미루나무와 은사시나무는 군락을 이뤄 어둑한 숲에서 새하얀 몸매를 뽐내고 있다. 나오미 해설사는 한국에 자라는 수종은 거의 다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했다.
그렇게 약 1시간 늪지대를 걸어 낮은 고갯마루를 넘으면 길은 고창 고인돌 유적으로 연결된다. 비스듬한 경사면을 따라 검은 바윗덩어리가 곳곳에 흩어져 있다. 평범해 보이지만 모두 기원전 400∼500년 청동기시대 집단 무덤으로 확인됐다. 주민들 역시 고인돌로 확인되기 전까지는 고추를 널어 말리거나 장독대로 활용했고, 때로는 선남선녀가 나란히 걸터앉아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고창에는 이곳을 비롯해 1,700여 기의 고인돌이 흩어져 있다. 그 형태도 탁자식(북방식), 바둑판식(남방식), 지상석곽식, 개석식 등 다양하다. 고인돌 유적 초입에는 코스모스 꽃밭이 넓게 조성돼 있어 하늘하늘한 꽃잎이 가을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약 2km 떨어진 지석마을에는 고인돌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탁자식 고인돌이 나지막한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다.
전문가의 해설을 곁들이면 운곡습지와 고인돌 유적의 가치가 한층 돋보인다. 고인돌 유적 입구 운곡습지 탐방안내소에 자연환경해설사가 상주하고 있다. 예약(063-564-7076)을 하면 해설사와 함께 습지를 둘러볼 수 있다. 고창군 생태관광 주민사회적협동조합(063-564-5582)도 습지학교, 노르딕워킹, 오감만족동행 등 운곡습지에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다음 달 12일에는 ‘고창 운곡람사르습지 생태탐방 레이스’가 열린다. 운곡습지를 중심으로 4개 구간을 달리는 행사로 22km와 12km 코스로 진행된다. 한국관광공사 전북지사는 운곡습지를 강소형 잠재관광지로 홍보하고 있다. 오충섭 지사장은 “많은 이들이 참가해 지속가능한 생태관광지로서의 가치가 널리 알려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드넓은 갯벌 가장자리에 움직이는 모래섬
올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이름을 올린 전북 서해안 국가지질공원은 까마득하게 넓은 갯벌과 서해 바다를 접하고 있는 고창과 부안군에 분포한다. 원생대부터 신생대 제4기까지 암석과 퇴적층을 볼 수 있는 자연학습장으로 고창에는 병바위와 도솔암 마애불, 고창갯벌과 움직이는 모래섬(셰니어) 등 13개 곳이 지질명소로 지정돼 있다.
고창 읍내에서 선운사 방면으로 가는 인천강변로를 달리다 보면 오른쪽으로 얼굴 모양을 한 커다란 바위 봉우리가 보인다. 사람의 두상과 워낙 흡사해 오히려 바위가 주변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병바위는 화산암 덩어리에 풍화작용이 더해져 형성됐다. 호리병 주둥이처럼 안으로 파인 절벽에는 벌집 모양의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지질 용어로는 타포니라 부른다. 깎아지른 바위 아래는 덩굴식물이 덮여 단풍 옷을 입었고, 꼭대기에는 키 작은 나무들이 머리카락처럼 듬성듬성 자라고 있다. 병바위는 뒤편 소반바위, 전좌바위와 함께 하나의 바윗덩어리였다.
위치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는 독특한 경관이라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진다. 옛날 신선이 인근 반암마을 잔칫집에서 술에 취해 잠결에 술상을 발로 걷어찼다. 바닥에 떨어져 거꾸로 박친 호리병은 병바위가 되고, 나가떨어진 술상은 소반바위가 되었다. 마을 이름인 반암은 소반바위에서 비롯됐다. 마을 뒤편에는 두암초당이라는 조그마한 정자가 전좌바위 절벽 아래에 그림처럼 걸려 있다. 병바위에서 반암마을까지는 소나무와 편백나무숲이 호젓한 오솔길을 이루고 있다.
인천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부터 드넓은 고창갯벌이 펼쳐진다.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파고든 곰소만 바다 건너에는 내변산 능선이 병풍처럼 솟아 있다. 다양한 바다 생물이 살아가는 고창갯벌은 운곡습지와 마찬가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지질공원, 람사르습지에 등재돼 있다.
조석간만의 차가 커 물이 빠지면 바다 건너 부안까지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갯벌 전체가 바닥을 드러낸다. 이맘때쯤이면 갯벌에도 단풍이 든다. 심원면 두어리 람사르고창갯벌센터 주변에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도록 탐방로를 개설해 놓았다. 범위가 워낙 넓어 자전거를 빌려 돌아보는 게 효율적이다. 센터에서 ‘고창 방문의 해’를 기념해 올해 말까지 무료로 대여한다. 제방으로 둘러진 갯벌생태공원은 가을 단풍으로 울긋불긋하다. 연보랏빛 갯개미취와 불그스름한 칠면초가 뒤섞여 있고, 군데군데 자란 갈대와 억새를 비롯해 노란 빛깔의 사초가 총천연색 추상화를 그린다.
이곳에서 바깥 바다로 조금만 나가면 전북 서해안 지질공원에서도 독특한 ‘움직이는 섬’이 있다. 광활한 갯벌 한 귀퉁이에 눈썹처럼 길쭉한 모래섬이 제방과 거의 나란히 붙어 있다. 움직이는 섬이라 해서 눈으로 확인될 정도는 아니다. 지질 용어로 셰니어(Chenier)라 부르는 이 모래섬은 약 1,800년 전부터 형성돼, 관측을 시작한 1967년 이래 육지 방향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 길이 1.3km에 폭 40~200m에 이르는 새하얀 모래섬은 만조 때도 물에 잠기지 않아 검푸른 바다나 황갈색 갯벌과 확연히 대조된다. 물이 빠지면 서쪽 끝에서 들어가 모래와 조개껍데기로 뒤덮인 섬을 걸어볼 수 있다. 맞은편 변산반도가 손에 잡힐 듯하다.
유네스코 타이틀은 관광지로서 위상을 높였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최승현 전라북도 기후환경정책과 주무관(이학박사)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 기고한 글에서 ‘사람과 자연이 함께 지속 번영하는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남겨진 과제라고 지적했다. 주민 스스로 자연 유산의 소중함과 보존 필요성을 인식하고, 현명한 활용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다.
10월 고창으로 여행한다면 고창읍성도 방문할 것을 추천한다. 19일부터 23일까지 일대에서 ‘모양성제’가 열린다. 답성놀이와 버스킹 공연이 예정돼 있고 지역 특산물 판매장도 펼쳐진다. 지역에선 고창읍성을 모양성(牟陽城)이라 부른다. 보리가 자라기 적합한 양지바른 고을이란 의미다. 성곽을 따라 한 바퀴 걸어도 좋고, 성안의 솔숲과 대숲도 운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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