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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희와 정치인의 현수막

입력
2023.10.13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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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실종자 송혜희씨를 찾는 현수막이 서울 남산 케이블카 주차장 인근 인도에 붙어 있다. 이영창 기자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누구나 한 번쯤 봤을 절절한 문구. ‘실종자 송혜희’를 찾는 현수막이 얼마 전 회사 근처 횡단보도에 걸렸다가 사라졌다. 혜희씨는 1999년 2월 13일 경기 평택시에서 귀가 도중 실종돼, 오늘로 9,008일째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혜희씨 나이 18세, 지금은 42세가 됐을 거다.

24년간 미제로 남은 이 사건은 가족 한 사람의 갑작스러운 부재가 일가족을 어떤 비극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어머니는 딸의 귀가를 기다리다 전단지를 품은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가산을 정리한 아버지는 생업을 포기하고 딸을 찾아 전국을 돌고 있다. 우리가 가끔씩이나마 송혜희 현수막·전단지를 볼 수 있다는 건, 그 아버지가 아직 딸의 무사귀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반갑고도 슬픈 증거다.

혜희씨를 찾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초인적인 집념 덕에 송혜희 현수막은 여전히 곳곳에서 보인다. 강변북로 육교 위, 남산 1호터널 남쪽 출입구, 남산 소월길 사거리와 소파길의 인도, 퇴계로 오토바이 거리 가로수에서, 나는 송혜희의 얼굴을 보고 머릿속에 다시 새긴다.

요 몇 달 혜희씨 현수막을 유심히 봤다. 그 결과 이 현수막 위치에 뭔가 ‘오묘한 균형’이 있음을 눈치챘다.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으되, 결코 행인이나 차량 이동에 방해가 되지 않는 지점에 현수막은 늘 걸려 있다. 아마도 그건 기초수급자 지원금 대부분을 현수막 제작에 쓰는 아버지의 사정 탓일 게다. 딸 찾는 게시물을 철거반에 뜯기지 않고 오래 붙여둘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아버지는 늘 고심하고 있을 것이다.

서울 시내에 붙은 정당의 정치 현수막이 행인들의 시야와 통행을 방해하고 있는 모습. 뉴스1

남의 눈에 띄어야 하면서도 눈길을 요란하게 사로잡아선 곤란하다. 이런 딜레마를 안고서 붙일 곳을 찾아야 하는 송혜희 현수막과 비교하면, 정치인들이 거리에 내건 현수막은 얼마나 뻔뻔하고 직설적인가. 통행을 방해하는 건 예사고, 자극적 표현이나 적나라한 조롱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정치 뉴스를 애써 피하며 ‘정치 디톡스’를 하고자 해도, 길에 나붙은 현수막 탓에 또 정치에 오염되고야 만다. 이런 저질 정치 현수막의 시각 테러는 옥외광고물법상 예외조항에 의해 15일의 생명을 항시 보장받는다.

애끊는 부정을 눌러 담은 가련한 현수막이 뜯기는 동안, 혐오를 자극하는 정치구호가 법의 보호를 받는 현실. 이 기막힌 차별이야말로 한국에서 정치인의 자유·권리가 일반 시민의 그것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보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다수 시민이 피와 땀으로 일군 정치적 자유의 과실을, 소수 정치인들이 독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깔끔한 통제’보다는 ‘지저분한 자유로움’이 더 낫기에, 당장 법을 바꿔 정당 현수막을 모조리 내려야 한다고는 차마 주장하지 못하겠다. 다만 이건 기억하자. 당신은 ‘정당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식 잃은 아비보다 더 쉽고 널리 자기 생각을 남에게 알릴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걸. 그렇게 소중하게 얻은 권리를 혐오 조장에 쓰지 말고 제발 남의 인생에 도움 되는 일에 제대로 써먹어 보라는 말이다.

하나 추가하자면, 미아나 실종자를 찾는 인도적 목적의 현수막에도 정당 현수막과 유사한 특례를 부여하거나, 공공 게시대 우선권을 주는 방안을 검토해 보시라. 그게 특권을 '공짜'로 먹은 이들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양심 아닐지.

이영창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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