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NK경남은행 횡령사건 재구성]
"주식 굴려보자" 50억원 빼돌려 시작
3개월새 '폭망'... 돌려막기로 횡령액↑
발각되자 도주생활 돕고 차명폰 연락
검찰에선 '공모범위' 두고 엇갈린 진술
"우리 이제 터졌다. 너도 해외에 나가 있든지 해. 나는 이제 연락 안 받고 도망 다닐 거야."
BNK경남은행 횡령사건 주범 이씨가 공범 황씨에게
두 사람의 3000억 원대 간 큰 횡령에 브레이크가 걸린 건 15년 만이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더니 50억 원대에서 시작한 회삿돈 횡령은 어느새 3,000억 원 규모까지 불어났다. 역대 최악의 사고로 기록된 BNK경남은행 횡령 사건은 고교 동창인 경남은행 부동산금융투자부장 이모(51)씨와 공범인 증권사 직원 황모(52)씨의 엇나간 우정에서 비롯됐다.
① 발단: '묶인 돈' 50억원 손대며 시작된 범행
시작은 1990년 상고 졸업 직후 경남은행에 입행한 이씨가 부동산금융팀장을 맡아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자금을 관리하게 된 2008년이었다. 같은해 7월 골프장 조성 사업을 위해 시행사가 대출 받은 PF 자금 191억 원이 경남은행 계좌에 입금됐다. 시행사 사정 탓에 당장 사용할 수 없는 자금이 50억 원이나 되는 걸 파악한 이씨는 '검은 유혹'을 느꼈다.
이 '묶인 돈'을 활용할 방법을 고심하던 이씨에게 증권가에 몸담아 주식 사정에 밝은 고교 동창 황씨가 떠올랐다. "노는 돈이 있는데, 주식으로 굴려보자"는 이씨의 달콤한 유혹에 황씨도 홀랑 넘어갔다. 황씨는 처남 계좌와 비밀번호를 이씨에게 알려줘 50억 원을 입금받았다.
처음엔 잠시 빌렸다 돌려놓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지만, 오판이었다.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며 글로벌 금융위기가 덮쳤다. 주식 투자 석 달 만에 25억 원이 증발했다. '폭망'한 셈이다.
이때부터다. 수중에 가진 것만으론 날린 돈을 메울 수 없었던 이들은 기존 횡령을 또 다른 횡령금으로 변제해 덮는 '돌려막기'를 택했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기에 더 치밀해질 수밖에 없었다. 역할도 좀더 세밀하게 나눠 이씨는 자금을 끌어왔고 황씨는 시행사 여러 곳 명의로 출금 전표를 위조해 돈을 빼냈다. 이씨가 "언제 얼마 들어올 거야"라고 알려주면, 황씨는 시행사 직원 행세를 하며 돈을 빼돌렸다. 의심을 사지 않도록 이씨의 아내, 장모, 처제 등 온 가족 은행 계좌를 돌려가며 사용했다.
주식 시장이 호황기를 맞은 2015년부턴 더러 수익이 나자 두 사람은 아예 페이퍼컴퍼니까지 차려 본격 범행에 나섰다. 이씨 명의로 세 곳, 황씨 명의로 한 곳을 세웠다. 7년간 횡령액수는 수백억 원대로 불어났다. 증권사에서 고객의 주식·선물 투자를 담당하는 프리랜서였던 황씨는 이씨를 '고객'으로 등록해 성과급까지 10억 원가량 챙기며 상부상조했다.
② 발각: 도주 제안에 은신처 마련까지 도와
이들 범행에 제동이 걸린 건 지난해 예금보험공사가 수상한 자금 흐름을 포착하면서부터다. 수사 당국이 움직였고 경남은행도 그제서야 자체 감사에 나섰다. 15년간 PF 부서에만 근무한 이씨는 회사 내 신망이 두터웠고, 은행은 그의 횡령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결국 올 7월 은행이 횡령 사고를 금융감독원에 신고하자 이씨는 돌연 결근했다. 그길로 페이퍼컴퍼니 사무실을 급히 찾아 황씨에게 "횡령 사실이 발각됐다"고 알렸고, '해외도피'를 조언하며 도피자금 명목으로 2억5,000만 원도 건넸다.
황급히 증거도 인멸했다. 황씨는 지인 최모(24)씨와 함께 이씨의 부탁대로 범행에 쓰인 컴퓨터를 포맷했다. 자금을 현금으로 바꿔 가족에게 일부 전하고, 주변엔 "6개월 동안 못 볼 것"이라고 알려뒀다. 베트남으로 도망치기 위해 인천국제공항까지 갔지만, 이미 출국금지된 상태였다. 최씨에게 부탁해 마련했던 차명 휴대폰도 추적이 두려워 공항 인근에 버리고 돌아온 황씨는, 추가로 최씨 명의 휴대폰을 또 개통했다. 그 뒤 이씨에게 "나 출국금지됐더라. 앞으론 이 폰으로 연락해"라고 이메일을 보냈다. 8월 초 검찰이 황씨 주거지를 압수수색했다는 소식도 텔레그램 메시지로 이씨에게 알렸다.
수도권 오피스텔 세 곳을 은신처로 삼아 도피생활 중이던 이씨는 부인을 시켜 김치통에 현금 4억 원을 숨겨놓거나 현금다발을 가방에 숨겨두기도 했다. 그중 한 곳은 황씨 딸 명의로 임차한 오피스텔이었다. 이렇게 서로의 도주를 도왔지만 결국 이씨는 지난달 검찰에 붙잡혔다.
③ 말로: 15년 만에 횡령 공범으로 함께 재판에
15년을 함께한 이들의 우정은 검찰청 조사실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특히 공모 관계에 대한 검찰 추궁에 서로 다른 진술을 했다. 황씨는 "친구가 강남에 살고 건물도 있어서 금원이 횡령자금이라는 점을 몰랐다"고 주장했지만, 이씨는 "걔는 내 자금사정을 다 안다"며 "초기부터 (횡령 사실을) 알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수사팀에 털어놓았다. 검찰은 황씨가 범행 초기부터 이씨의 횡령에 적극 가담한 것으로 판단했다.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는 이달 1,387억 원을 사적 유용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으로 이씨와 황씨를 잇달아 구속기소했다. 황씨가 재판에 넘겨진 이튿날, 금감원은 이들이 2,988억 원을 횡령했고, 범행 과정에서 사칭한 시행사도 17곳이라는 최종 조사 결과를 내놨다. 현직 은행 직원 개인이 저지른 금융권 횡령 사고 중 최고액이었다. 금감원 수사 의뢰에 따라 검찰도 추가 조사를 거쳐 이들에게 1,500억 원대 횡령 혐의를 추가 적용해 기소할 방침이다. 이들은 내달 5일부터 나란히 법정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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