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억 상당 명품 사기쳐" 주장
알고 보니 매장이 몰래 바꿔치기
태국인도 관세법 위반으로 입건
"모조품을 갖고 와선 자꾸 진품이라고 우기잖아요!"
지난달 19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한 명품 매장으로부터 다급한 112신고가 접수됐다. 시계 매도를 약속한 태국인이 가짜 리차드밀 6점을 가져와 속이려 든다는 내용이었다. 진품이라면 다 합쳐 40억 원을 호가할 모델이었다. 매장 관계자가 내민 시계들은 실제 감정 결과 가품으로 확인됐고, 경찰은 현장에서 태국 국적 A씨를 사기 혐의로 현행범 체포했다.
그런데 A씨가 강남경찰서에 붙들려온 후 상황은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시계를 가짜로 바꿔치기한 건 매장 직원들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스스로를 '태국 갑부'로 소개한 A씨는 통역을 붙여주자 "사진을 찍겠다고 해 시계를 건넸는데, 그새 빼돌린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이전에도 매장 측이 제안해 두 차례 거래한 적이 있는 터라 이번에도 믿고 찾은 것이라고 했다.
경찰은 처음엔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수십억 원짜리 명품 거래를 했다는 그의 주장을 선뜻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내 매장 관계자들의 태도에서 수상함을 눈치챘다. 피해 신고를 하면 경찰에 적극 협조하는 게 상식인 데도, 직원들은 말을 아끼는 낌새가 역력했다. "A씨한테 거래대금으로 주려던 40억 원은 어디 있느냐"는 경찰 질문에 매장 직원들은 당황하며 우물쭈물했다.
의문투성이 시계 도난 사건은 폐쇄회로(CC)TV 분석을 통해 실타래가 풀렸다. CCTV 영상엔 사진을 찍겠다며 A씨 시계를 가져간 직원이 매장 안쪽 칸막이 뒤로 들어갔다가 쇼핑백을 들고 나오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뒤이어 또 다른 직원이 쇼핑백을 챙겨 매장 바깥으로 나가는 장면과 A씨 휴대폰을 CCTV 사각지대로 갖고 들어가는 제3의 인물도 찍혔다. 누가 봐도 바꿔치기와 증거인멸을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간접 증거로 매장 관계자들의 체포영장을 받아낼 순 없었다. 경찰은 상가 일대 CCTV를 샅샅이 뒤진 끝에 결정적 증거를 확보할 수 있었다. 쇼핑백을 들고 나간 직원이 근처에서 차를 세우고 기다리던 한 남성에게 이를 건네는 모습이 찍힌 것이다. 화질은 좋지 않았지만, 운전자가 쇼핑백 안에서 꺼낸 종이는 A씨가 가져온 품질보증서로 보였다.
법원도 매장 직원들의 범죄 혐의가 상당 부분 인정된다고 봤다. 끈질긴 추궁 끝에 경찰은 체포된 일당 4명 중 한 명의 자백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고, 15일 이들을 특수절도·무고 혐의로 구속송치했다. 공범 1명은 불구속 상태로 검찰에 넘겼다.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던 사건은 마지막 반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이 수사를 해보니 A씨가 시계를 한국으로 들여오는 과정에서 세관에 제대로 신고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강남서 관계자는 "A씨에겐 밀수출입죄 혐의를 적용해 관세청에 통지했다"며 "아직 회수되지 않은 리차드밀 시계 4점은 일당의 동선을 추적해 행방을 파악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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