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골적 인종차별에 집중포화 맞자
18개월 만에 두 줄짜리 서면사과
#. 흑인 소녀가 우쭐한 표정으로 자신의 목에 메달이 걸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시상자는 이 소녀만 쏙 뺐다. 시상대에 나란히 선 백인 소녀들에게만 메달을 걸어줬다. 투명인간 취급을 당한 흑인 소녀는 주변을 둘러보지만 누구도 상황을 바로잡지 않는다.
지난해 3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열린 체조대회 '짐스타트(GymSTART)' 시상식에서 벌어진 일이다. 노골적 인종차별을 포착한 이 영상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뒤늦게 전 세계로 퍼졌다. 대회를 주관한 아일랜드체조협회는 집중포화를 맞았다. 그러나 18개월 만에 내놓은 뒤늦은 사과는 '못쓴 사과문'의 정석이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해"
24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 아일랜드 아이리시인디펜던트에 따르면, 소녀의 어머니는 "딸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시상식에서 무시당했다"며 협회의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 소녀는 당시 대회의 유일한 흑인 참가자였다.
소녀의 가족은 협회가 스포츠계에 만연한 구조적 인종차별을 인정하길 거부하고 시상자와 소녀의 개인적 문제로 축소했다고 여긴다. 문제가 제기된 이후에도 유색인종 선수 보호와 차별 금지 약속을 비롯한 어떤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협회는 "시상자는 이번 일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충분히 인정했으며, 다만 고의가 아니었다고 했다"며 "실수를 인지하자마자 즉시 바로잡았다"고 밝혔다. 경기장을 떠나기 전 소녀에게 메달을 전달했다고도 덧붙였다. "지난 8월 스포츠 분쟁 조정 기구를 통한 중재에 합의했으니 해결됐다"는 게 협회의 기본 입장이었다.
가족들은 '나 홀로 싸움'을 이어갔다. 스포츠계 인종차별에 맞서 온 활동가 켄 맥큐는 "아일랜드 체육계와 정치권의 무관심이 소녀를 보호하지도, 인종차별에 대처하지도 못했다"면서 "아일랜드 인권평등 위원회(IHREC)와 아일랜드 올림픽연맹 등에서도 전혀 지원이 없었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국제적 비판 일자… 18개월 만 '두 줄짜리 사과'
18개월간 뭉개던 협회를 움직인 건 국제사회의 비판 여론이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미국의 흑인 체조선수 시몬 바일스는 지난 23일 SNS에 "마음이 아프다. 어떤 스포츠에서도 인종차별은 용납될 수 없다"는 글을 올려 소녀를 응원했다. 다른 체조 선수와 유명인들도 영상을 공유하며 여론을 움직였다.
24일 협회는 소녀의 가족에게 사과의 뜻을 표했지만 제대로 된 사과는 아니었다. "관계자들에게(To whom it concerns)"라고 사과 대상을 특정하지 않은 두 줄짜리 서면 사과였다. 소녀의 어머니는 "인종차별에 대한 언급이 없고 '다음 흑인 아이는 안전할 것'이란 약속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협회는 시상자의 사과도 가로막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시상자는 장문의 사과 편지를 쓰고, 소녀를 직접 만나 사과하고 싶다는 뜻을 협회 측에 전했지만 가족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가족들은 국제체조연맹(FIG) 산하 체조윤리재단에 이 사안을 문제제기할 계획이다.
아일랜드에선 2017년부터 인도계인 리오 버라드커가 총리를 맡고 있지만 인종차별이 종종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