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무기공장 ‘조병창’ 연구자 3명 인터뷰]
“일제가 쇠붙이란 쇠붙이는 다 공출해 갔어. 우리 어머니 비녀까지 싹 가져갔다니까.”
허광무(59) 한일민족문제학회장이 어렸을 적 할머니에게 종종 들었던 얘기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약탈한 놋그릇과 비녀까지 녹여서 침략 전쟁에 쓸 총과 탄약을 만들었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은 인천과 중국 만주, 일본에서 8곳의 조병창(무기 공장)을 운영했다. 조병창은 일제의 가해의 역사를 증언하는 상징적인 유적인 셈이다.
허 회장과 정혜경(63)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 조건(46)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등 일제강점기 관련 역사연구자 3명이 최근 일본에 남아 있는 조병창 유적을 답사했다. 이들은 낮 최고기온이 섭씨 35도에 달하는 불볕더위 속에 도쿄와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에 남아 있는 조병창 유적과 사이타마현 가와고에제조소 유적 등을 둘러봤다.
일본 조병창 유적은 흔적만 남아
일본의 조병창 유적은 흔적만 남아 있었다. 부지엔 공공기관, 병원, 학교, 공영아파트 등이 들어섰다. 도쿄제1육군조병창은 태평양전쟁 말기 총기 공장 일부를 인천 조병창 지하공장으로 이전하려 했던 곳이라 역사적 의미가 깊지만 벽 일부만 남았다. 도쿄제2육군조병창은 이타바시구 사적공원 구석에 화약연구소 건물 일부만 남아 있다. 정 연구위원은 “일본의 화학 기술력을 자랑할 수 있는 유적이라고 여겨 남겨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됐던 하시마(군함도)를 포함한 탄광과 군수 시설을 ‘메이지시대 산업혁명유산’이라 이름 붙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것과 비슷한 관점이다.
사가미하라의 사가미육군조병창은 대체로 온전하게 남아 있었지만 전쟁 후 일본에 주둔한 미군이 사용하면서 대폭 수리해 과거의 모습이 사라졌다. 무기 공장이었다는 것을 알기 어려운 수준이 됐다.
"인천 조병창, 조선을 '병참기지' 삼았던 증거물"
연구자 3명은 이번 답사를 통해 인천 부평에 있는 ‘인천육군조병창’의 역사적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일본엔 흔적밖에 없지만 인천엔 온전한 형태의 건물과 관련 자료가 남아 있어 연구 가치가 매우 크다는 것이다. 조 연구위원은 “인천 조병창은 식민지 조선을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 삼았던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라고 강조했다.
인천 조병창은 곧 헐릴 위기에 놓여 있다. 인천시와 국방부가 조병창을 철거하고 공원으로 조성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기 때문이다. 조병창은 해방 후 미군 기지로 사용되다 반환됐는데, 이때 발생한 토양오염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명분이다. 시민단체들이 공원 조성 계획 중단 가처분신청을 냈지만 역사적 가치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탓에 철거에 찬성하는 지역 주민이 많다. 조 연구위원은 “공원화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비용과 시간을 들이면 건물을 철거하지 않고도 토양오염을 제거할 수 있으니 일단 남겨두고 보수를 해서 역사공원으로 만드는 방법을 검토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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