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류현경에게 연극 '3일간의 비'는 특별하다. 평소 운명론자이기도 한 그는 이 작품을 받자마자 강렬한 끌림을 느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작품이라 느꼈기에 고민하는 시간도 길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옳았다.
'3일간의 비' 무대에서 류현경은 그간 쌓아온 연기 내공을 가감없이 분출한다. 지금껏 보여준 매체 연기 이상의 큰 울림과 놀라움을 준다. 함께 연기한 배우가 무대에서 내려와 "현경아 너 너무 잘하더라"라고 감탄을 금치 못한 날, 류현경은 울었다. 배우에게도 경이롭고 기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3일간의 비'는 1995년과 1960년대의 두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유명 건축가인 아버지의 유산을 정리하던 중 발견된 일기장을 통해 과거 부모 세대의 진실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현재에서 과거로 가는 연출을 통해 출연 배우들은 모두 1인 2역을 소화한다.
류현경은 가정적인 모범 주부 낸과 그녀의 어머니 라이나를 동시에 연기한다. 두 캐릭터의 매력에 푹 빠져있는 류현경을 본지가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하 류현경과 일문일답.
-'3일간의 비' 제안을 받은 시기와 선택 이유가 궁금하다.
"올 초에 제안을 받았다. 이야기 자체가 내가 뭔가 찾을 수 있는 것이 있겠다 싶었다. 대사 안에 숨겨진 의미들을 연습을 하며 찾아봐야겠다 싶어서 호기심이 갔다. 함께하는 배우들도 좋았다. 이동하 오빠는 '렁스'라는 연극을 같이 했고 김주헌 오빠는 '요정' 영화를 같이 해서 이번에 연극을 같이 하면 너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난 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는지.
"맞다. 박정복 김바다 김찬호 유현석 배우는 다들 처음 호흡한다. 너무 신기한 게 어떻게 다들 이렇게 작품에 진심일 수 있나 싶다. 우리는 무언가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대사 하나도 허투루 생각하지 않고 의미있게 하고자 한다. 매번 공연 때마다 너무 감사해서 사진을 남기고 있다."
-꾸준히 연극 무대에 오르는데 연극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나.
"제일 큰 매력은 관객과 함께 호흡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극 속에 있지만 관객도 극 속에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 여정을 함께하는 기분을 느낀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고 그때그때 관객들의 호흡이 다르니까 그것도 재밌다."
-1인 2역은 어떻게 준비를 했는지.
"외적으로는 변화가 보여야 하니 신경을 많이 썼다. 연출님도 옷이나 머리나 그런 건 다르게 가는 게 좋다고 했다. 나는 대본에 충실하려 노력했다. 1막의 낸이 라이나의 딸이니까 공통적인 부분도 있을 거고 아예 확 다른 것도 있을텐데 대사와 대본에 나와있는 대로만 하면 이건 확실히 달라보일 수 있겠다는 믿음이 있었다."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사는 인물을 연기하기에 쉽지는 않았을 듯하다.
"1막의 낸은 동생이 계속 사라지고,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건이 있어서 그러한 결핍이 남매에게 심어졌다고 생각한다. 동생이 사라졌을 때 항상 걱정을 하다가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을 때 동생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이 크게 다가왔다. 어찌 하면 단순하지 않고 섬세하게 표현을 할까 아직도 고민을 한다. 2막의 라이나는 낸의 엄마인데 텍스트상으로는 60년대의 자유분방한 남부 출신의 여자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당시 상황에서 시대적인 배경이 주는 안타까운 그런 걸 더 그리고 싶었다."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 무엇인지.
"대사와 원문에 숨겨져있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관객들이 받아들이는 중의적 표현이 어떻게 해석하나에 따라 달라지는 말이 있다. 섬세하게 전달하고 싶은데 배우는 연기로 할 수밖에 없지 않나. 고민을 밤새도록 매일 했다. 새벽 2시에 연습을 다 끝나고 나왔는데도 단어 하나, 문장 하나로 배우들과 3시간을 얘기했다. 공을 많이 들인 작품이다."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나.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마지막에 "네가 날 살렸어"하는 말이다. 그 말이 크게 극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서로가 서로를 살린 건가 아니면 불행의 시작을 살렸다고 표현한 건가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3일간의 비가 내린 운명적인 시간과 말들, 과연 그것들이 좋았던 것인가. 결혼한 분들이 극을 보면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는 얘길 들었다. 그래서 그 대사가 가장 기억이 난다."
-첫 공연을 올린 날이 기억 나나.
"과거 '렁스' 연극을 했을 때는 진짜 너무 떨려서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두 명이 무대에서 등퇴장 없이 계속 대화하고 하는 연극이라서 둘만 의지하고 관객을 의지한다. 이번엔 그때처럼 떨리진 않았다. 서로를 너무 믿었고 우리 셋(이동하 김주헌 류현경)이 앙상블이 끈끈하기 때문이다. 뭔가 하나 삐져나가는 게 없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등퇴장도 있고 1막 2막과 사이도 있어서 그런 부담이 덜했던 것 같다."
-실제론 오빠인 김주헌이 이번엔 동생 역을 맡았다. 남자 배우들과의 호흡도 좋았는데.
"주변에서 처음엔 '오빠가 동생 역을 하는 거 괜찮냐' 했는데 (김주헌이) 워커 같은 구석이 있어서 진짜 동생 같았다. 연기할 때는 너무 동생 같은 순간이 많았고 그 순수함과 워커처럼 자유로워 싶어지고 하는 모습이 잘 묻어나서 몰입이 잘 됐다. 이번에 워커 역을 맡은 세 명의 남자 배우들이 말 더듬는 연기를 너무 잘해서 신기했다. 놀라울 정도로 각자 스타일에 따라 다르게 말을 더듬는다. 연기를 다 너무 잘해서 존경스럽다."
-'3일간의 비' 공연을 하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언제였나.
"배우들과 주고받는 순간들이 너무 감동적인 순간이 많다. '이 에너지를 나를 위해 준다고?' 하는 생각에 감격스럽다. 만족스러웠던 공연날은 눈물이 난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 밑에서 워커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박정복 배우가 칭찬해준 날이 있다. '현경아 너 너무 잘하더라'라고 했는데 평소 좀 시크한 친구여서 그때가 제일 감격스러웠다. 진심어린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집에 가서 울었다."
-관객들의 반응도 뜨거운 것 같은데.
"공연이 너무 좋았던 날은 SNS 메시지가 쏟아진다. 기립박수가 나오는 날은 기분이 너무 좋다. 내 마음과 관객의 마음이 맞아 떨어지는 날이 있다. 팬들이 보내주는 반응들은 너무 고마워서 캡처한다. 어느 날은 기립박수를 받고 감사했는데 한 관객이 '오늘은 확신의 기립의 날이었다'고 말을 해주는데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더라. 정말 감사했다."
-'3일간의 비'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나.
"이 작품은 하면 할수록 보면 볼수록 사랑에 대한 얘길 하는 거 같지만 '이성적인 사랑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여러분' 하는 느낌이 든다. 사랑이나 인간이라는 게 이분법적으로 나눠질 수는 없는 거 같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저 내 생각은 그렇다. 사실은 우리가 살면서 답을 내리고 싶어하는 부분들이 있지 않나. 하지만 인생에 정답은 없다고 얘기하는 게 아닐까 싶다. 무언가 답을 찾으려 하거나 규정짓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연기에도 정답이 없는 건 마찬가지 같다."
-류현경에게 사랑이란.
"나는 나 자체가 사랑이 아닐까 싶다. 워낙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서 모든 게 사랑으로 느껴진다. 극을 할 때는 작품을 너무 사랑하고 배우들고 사랑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이 커지고 많아지는 느낌이 든다. 앞으로 '류사랑'이라고 불러달라. 하하. 내가 아역으로 시작해 28년간 80편의 작품을 했다더라. 너무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 일을 원래도 좋아했지만 더 좋아하고 더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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