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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쇼핑시키고 수수료 받아 비참… 갑질 당하는 가이드 업무 개선돼야"

입력
2023.09.21 04:00
수정
2023.09.22 18:09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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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숙 한국관광통역안내사협회장 인터뷰>
법적 보호 못 받고 여행사 갑질에 업계 떠나
가이드 고용보험 가입률 겨우 4% 수준 불과
외국인 쇼핑 할당액 미달 땐 여행사에 벌금
남녀 혼숙까지…"가이드 무너지면 관광 붕괴"

박인숙 한국관광통역안내사협회장이 14일 서울 성동구 왕십리로에 위치한 한국관광통역안내사협회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윤서영 인턴기자

박인숙 한국관광통역안내사협회장이 14일 서울 성동구 왕십리로에 위치한 한국관광통역안내사협회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윤서영 인턴기자


"관광객들이 쇼핑 할당액을 채우면 가이드에게도 수수료가 조금 떨어져요. 돈을 받아도 비참함을 느끼죠. 저희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니까요."

30년 차 베테랑 관광통역안내사(여행 가이드)인 박인숙 한국관광통역안내사협회장은 지난 14일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서울 성동구 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중국, 베트남, 동남아 등 일부 국가 관광객을 안내하는 가이드가 여행산업 안에서 완벽한 '을'로 전락한 현실에 좌절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외국인 관광객에게 우리 문화를 제대로 알리고 편한 여행을 도와 한국을 '또 찾고 싶은 나라'로 만드는 게 가이드의 역할이지만, 프리랜서 신분인 탓에 여행사 눈치를 보며 부당한 대우를 참을 수밖에 없다.

가장 큰 문제는 기본적 보호조차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지난해부터 가이드는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 됐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박 회장은 "근로계약서를 쓰거나 고용·산재보험에 가입하자고 하면 여행사가 일거리를 주지 않는다"며 "밥줄이 끊기는데 누가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관광안내사협회에 따르면 여행 가이드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은 3만6,000명으로, 이 가운데 현업에서 뛰는 사람은 1만2,000명 정도다. 박 회장은 "현업 가이드의 4.1% 수준인 500명 정도만 고용보험에 가입돼 있을 정도로 근로 조건이 열악하다"고 말했다.

"비용 떠넘기고 쇼핑할당액 강제"


8월 21일 서울 종로구 북촌 한옥마을을 찾은 외국 관광객들이 관광버스에서 내려 걷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8월 21일 서울 종로구 북촌 한옥마을을 찾은 외국 관광객들이 관광버스에서 내려 걷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고용 상태가 불안하다 보니, 가이드는 여행사의 여러 갑질에 쉽게 노출된다. 이 과정에서 한국 관광을 망치는 나쁜 관행에 휘말려 오해를 받기도 한다. '외국인을 상대로 한 저가 덤핑 관광의 행동대장을 한다'는 인식이 대표적인 예다.

비행기 티켓과 호텔 비용조차 충당하기 어려운 염가에 관광상품을 판매한 국내 여행사들은 '비용 회수'를 위해 가이드에게 관광객 1명당 100만 원의 쇼핑액을 채우도록 강요한다. 이를 달성하지 못하면 가이드에게 줘야 하는 팁을 주지 않거나 벌금을 매긴다. 가이드에게 먼저 예치금을 받은 뒤 쇼핑할당액을 채우지 못하면 돌려주지 않는 여행사도 있다. 박 회장은 "관광객 지갑을 털지 못하면 능력 없는 가이드로 찍혀 일이 안 들어오고, 심지어 일당까지 뜯기기도 한다"며 "울며 겨자 먹기로 덤핑 관광에 동원되는 현실에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한국일보 8월30일 '건어물 한 봉지 6배 폭리 "관광객엔 그렇게 팔지 않나요"' 참고)

비용을 떠넘기는 경우도 다반사다. 관광객을 데리고 지방으로 내려갈 때 발생하는 가이드 숙박비와 식비는 관행적으로 모두 가이드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여행사에선 근무 시간이 지난 늦은 밤까지 가이드가 붙어주길 원한다. 물론 추가 수당은 없다.

'남녀 혼숙' 문제까지 있다고 한다. 유커를 받는 일부 여행사가 비용을 아끼려고 여성 가이드에게 남성 운전기사 및 사진사 등과 한 방을 쓰도록 한다는 것. 박 회장은 "여행사와 가이드 간 표준약관에 금지사항으로 규정됐는데도 개선이 안 되고 있다"며 "노동권 침해 정도 차원을 넘어 여성인권과 직결된 문제"라고 토로했다.

유커 쏟아지는데…"가이드가 없어요"


중국인 단체관광객(유커)이 8월 31일 오후 제주의 대표적 관광지인 용두암을 찾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시스

중국인 단체관광객(유커)이 8월 31일 오후 제주의 대표적 관광지인 용두암을 찾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시스

이처럼 불합리한 대우 탓에 가이드업계는 붕괴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당시 여행업이 문을 닫으면서 가이드들은 물류창고나 배달, 단순 사무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박 회장은 이때를 회상하며 "목숨 걸고 버텼다"고 했다.

문제는 이들이 다시 여행업계로 돌아오길 주저한다는 점이다. 코로나19 이전과 비교해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협회에 따르면 코로나19 엔데믹(풍토병화) 이후에도 떠났던 가이드의 절반조차 복귀하지 않았다.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각종 갑질에 노출됐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관광 전공 학생들이나 어학 능력을 갖춰 '민간 외교관'으로 인생2막을 준비했던 시니어들이 가이드 업무를 외면하고 있다.

박 회장은 "빈자리를 한국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무자격 가이드가 채우고 있다"면서 "유커가 몰려온다는데 가이드가 부족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어 "양질의 가이드 서비스가 제공되지 못하면 장기적으로 관광산업 전체가 무너질 것"이라며 "가이드 처우 개선과 갑질 청산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송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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