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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범 손가락질하며 '야동' 공유... 폭력의 타자화, 범죄는 반복된다

입력
2023.09.02 15:0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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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폭력의 스펙트럼과 남성의 역할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단체 회원과 시민들이 8월 24일 오전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성폭행 살인 사건 현장 인근에서 추모 집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단체 회원과 시민들이 8월 24일 오전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성폭행 살인 사건 현장 인근에서 추모 집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벌어진 신림동 성폭행 살인사건 피의자 신상이 공개됐다.

사진과 함께 이름, 나이 등 정보가 알려졌고 일부 언론은 그의 유별남을 부각한 사진과 제목으로 클릭을 유도했다. 이어서 인터넷에는 내가 범죄자의 이런 소식까지 알아야 하는 건가 싶은 TMI(Too Much Information)가 쏟아진다. 흉악범죄 피의자의 신상이 공개될 때마다 반복되는 이런 현실에 마음이 복잡하다. 죄질에 비해 처벌은 언제나 미약하기에 신상공개라는 방식이라도 필요한 게 아닌가 싶으면서도, 이게 과연 실제로 범죄를 예방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건가 싶은 의심도 계속된다. 실로 내가 흉악범의 얼굴을 알게 된다 한들 징역을 마치고 몇 년이나 지난 후에 그 사람을 알아차리고 조심할 수 있을까? 범죄자들은 얼굴이 공개되는 것이 두려워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될까? 오히려 자신의 얼굴을 알리겠다는 그릇된 의도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지는 않을까? 심란한 마음만 커진다.

가해자 구분 짓기만으로 일상은 안전해지지 않는다

흉악범 사진이 올라오면 ‘역시 관상은 과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과학 좋아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뒷목 잡을 이야기지만, 한편으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맥락을 모르지 않았기에 애써 말을 얹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안전’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관상을 통해서 범죄를 저지를 것 같은 사람을 미리 분석할 수 있다면 나의 삶이 조금이나마 더 안전해지지 않을까 하는 아주 본능적이고 절박한 욕구 앞에, 관상의 무용함을 애써 설명하며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게다가 많은 언론과 미디어는 범죄를 마치 스릴러 장르물 다루듯 했다. 방송사는 연예인과 재연배우를 동원해서 가해자의 잔인무도함과 유별난 특징을 강조했다. 이를테면 얼마나 오랫동안 게임을 했는지, 얼마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정신적으로는 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구구절절 소개했다. 심지어 가해자가 살던 곳을 방문해 가족과 이웃을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여과 없이 내보내기도 했다. 범죄 예방을 위해 가해자를 분석하고자 하는 목적보다는 그저 시청률과 조회수를 위해 가해자의 서사를 자극적으로 부풀리고 범죄는 흥밋거리로 취급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손쉽게 가해자와 자신을 분리하여 먼발치에서 안전하게, 일말의 죄책감이나 불편함 없이, 그저 자극적으로 사건을 소비하기만 했다.

그것이 개인에게 어느 정도 안도감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개인을 안전하게 만들 수는 없다. 당장 피의자 신상공개가 범죄 예방에 실질적인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미지수다. 지난 3월 발행된 국회입법조사처의 '피의자 신상정보공개제도의 현황·존폐·보완 검토' 보고서를 보더라도 신상정보공개제도 도입 이후에도 강간죄 발생은 계속 증가했다는 점에서 범죄 예방 효과에 대해 의문시하고 있다. 다른 자료를 곱씹어봐도 마찬가지다. 범죄 예방 효과를 높이려면 피의자 신상정보공개제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안전한 일상을 위해 우리에게는 그 이상의 논의가 필요하다.

재난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을 뒤흔드는 재난과 사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전에 문제를 예방할 수 있는 수십 차례에 이르는 경미한 사고와 수백 번의 징후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에게도 너무나 잘 알려진 하인리히의 법칙 이야기다. 이는 산업재해를 둘러싼 통계적 법칙으로 안전을 위해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일깨워 줬다. 그리고 이 법칙은 성폭력을 둘러싼 범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 가능하다. 한 건의 성폭력, 한 명의 가해자가 나타나기 이전에 수십 번에 달하는 성차별적 언행과 폭력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물밑에는 그러한 언행과 폭력을 조장하고 용납하는 여성혐오적이고 성차별적인 문화가 깔려 있다. 이를테면 ‘N번방 사건’으로 알려진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 역시 그렇다. 이 범죄와 가해자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다. 그에 앞서 무수히 많은 불법촬영물이 이른바 ‘국산 야동’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 않게 유포되는 현실이 있었고, 각종 웹하드 업체가 이를 악용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음이 이른바 ‘웹하드 카르텔’ 사건으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자라면 으레 ‘야동’쯤은 볼 수 있지,라는 식의 암묵적인 방조가 결국 조주빈을 비롯한 성 착취 가해자들을 만들어냈다. 이처럼 폭력은 진공 속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에 앞서 수많은 폭력이 전조증상처럼 펼쳐져 있다. 폭력은 스펙트럼으로 존재한다.

폭력의 스펙트럼과 ‘타자화’의 한계

뉴스에 등장하는 성폭력 사건은 가차 없이 비난하며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열을 올리던 많은 남성도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일상의 성차별적 인식과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는 이야기에는 인색하다. 하지만 폭력의 스펙트럼에 대한 이해와 자신의 일상에 대한 성찰과 변화 없이 외치는 정의구현은 그저 도덕적 우월감을 뽐내기 위한 쑥스러운 인정투쟁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런 이야기들만으로는 우리의 일상이 안전해지지 않는다. 성폭력 문제를 향한 분노가, 착한 사람이고자 하는 마음이 진심이라면, 우리는 불편해지기를 무릅써야 한다. 정희진 선생님의 책 '페미니즘의 도전'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안다는 것은 상처 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페미니즘의 도전' (22쪽)

정희진 선생님의 말마따나 앎의 과정은 불편하기 마련이다. 안락하고 평온한 일상에서 벗어나 매일 약 55건의 성폭력이 발생(2021년 기준 성폭력 발생건수 2만277건)하고 있음을 직시하는 것은 실로 불편한 일이다. 게다가 그 불편함을 받아들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려고 해도 이런 거대한 차별과 폭력 앞에서 ‘안전’을 이야기하기에 개인은 그저 너무 작고 미약한지라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라 어렵기도 하다. 나 역시 이런 문제가 반복될 때마다 그저 주변 여성들에게 조심하라고 이야기하거나 가해자를 더 크게 비난하며 손가락질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도 곧 멈추게 됐다. 당장 산책로에서, 번화가 한복판에서 이런 문제들이 반복되는 와중에 ‘조심하라’는 말이 또다시 여성을 단속하는 것 외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나 겨우 손가락질하는 것도 결국 “나 빼고 다른 남성은 다 늑대!”라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더 나은 방법은 없을까 찾아 헤매다가 처음에는 “너희는 20세기에 살아, 우리는 21세기로 갈 거야!”라는 말과 함께 이른바 ‘손절’, 즉 성차별적 발언과 행동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끊는 방법을 시도했다. 실로 세상은 바뀌고 있고 구시대에 머무는 사람은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협박 아닌 협박은 나름 힘이 있었다. 특히 남성으로 살아가며, 남성 집단 안에서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남성연대에 균열을 내는 게 나의 역할이라고 믿었기에 다른 남성을 대상으로 목소리 높였지만 그 언어가 조롱과 비난의 모습일 때, 균열이 나는 것은 내 인간관계뿐이었다. 게다가 당장 나부터도 불과 몇 년 전까지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과 말, 행동을 했던 한 사람으로서 이제는 달라졌다고 면죄부 받은 양 손가락질하는 것은 결국 앞서 범죄 가해자를 타자화하는 한계의 반복에 지나지 않았다.

상대를 타자화하지 않으며 남성연대에 균열을 만들기 위해

군 생활을 함께한 어느 친구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다가 페미니즘을 욕하거나 여성혐오적인 게시글을 발견하면 꼭 나에게 가져와 의견을 구한다. 처음에는 스스로 문제에 대해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 태도가 짜증 나고 답답했지만, 한편으로는 또 어디에 물어보겠나 싶어 귀찮음을 무릅쓰고 나름대로 답을 해준다. 군 생활을 통해 쌓인 신뢰와 관계는 우리가 가진 이해의 벽을 뛰어넘는 윤활제가 됐다. 물론 내가 이런다고 주변 친구들이 당장 페미니즘을 공부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쟤가 저렇게 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최소한 내 앞에서라도 언어를 고르고 눈치를 보게 된다. 대단하지 않지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또 누구나 함께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천이다. 이런 변화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조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성향을 지닌 청년남성에게 페미니즘을 어디에서 접했는지 물어보았을 때, 과반수(63.2%)가 ‘주변인’의 존재를 이야기했다. ‘적대적 성차별·반페미니즘’(15.8%), ‘온정적 가부장주의’(21.1%) 성향의 청년남성에 비하면 대조적인 수치였다. 이를 통해 ‘주변인’을 매개로 페미니즘을 접한 이들이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를 더 적게 갖게 되고 성차별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되었으리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폭력의 스펙트럼은 단지 문제가 중첩되어 있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대하게 느껴지는 문제도 결국 작은 문제들의 연속선에 놓여 있는 만큼, 그 안에서 작게만 느껴지는 개인의 역할이 얼마나 큰 문제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지 역시 보여준다. 작금의 폭력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진정으로 더 안전한 사회가 만들어지기를 바란다면, 타자화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 이제는 남성들이 바통을 넘겨받을 차례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이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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