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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서 죽었다

입력
2023.08.23 06: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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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동 사건’ 비롯한 일련의 ‘젠더폭력’
여성에 차별·폭력적인 사회구조와 연결

‘강남역 살인사건’ 7주기인 올해 5월 17일 여성단체 활동가를 비롯한 여성들이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로 다시 나왔다. 이들은 “국가가 젠더폭력에 답을 내놓으라”고 외쳤다. 뉴스1

‘강남역 살인사건’ 7주기인 올해 5월 17일 여성단체 활동가를 비롯한 여성들이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로 다시 나왔다. 이들은 “국가가 젠더폭력에 답을 내놓으라”고 외쳤다. 뉴스1

여자라서 죽었다. 여자라서 또 당했다. ‘신림동 공원 강간·살인사건’만이 아니다. 올해 3월 서울 노원구에서 70대 남성이 스토킹하던 60대 여성을 살해했다. 지난해엔 ‘인하대 성폭력 살인사건’(7월),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9월)으로 나라가 들썩였다. 2021년 7월에도 서울 마포구에서 20대 여성이 교제하던 남성에게 폭행당해 숨졌다.

강력 범죄로 범주를 넓히면, 세다가 지친다. 지난달 경기 의왕시 한 아파트에선 남성이 여성을 폭행하고 강간하려다 붙잡혔다. 범인은 혼자 엘리베이터에 타는 여성을 노렸다. 같은 달 서울 노원구, 1월 관악구에서도 남성이 여성을 뒤따라가 때리고 성폭행을 시도한 사건이 일어났다. 오피스텔 복도에서 남성이 여성을 돌려차기로 쓰러뜨리고 폭행한 ‘부산 강간·살인 미수 사건’으로 공분한 게 1년 전이다.

여성들이 공원에서, 대학 캠퍼스에서,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죽어나간다. 집에서, 길거리에서, 엘리베이터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다. 피해자들이 당한 이유는 이것, ‘여자라서’다.

여성들은 ‘신림동 사건’이 남 일 같지 않다. ‘너클이 그렇게 강력하다면 나를 지킬 수도 있을까.’ 구매버튼을 누르는 여성들의 클릭엔 분노와 열패감, 공포가 뒤섞여 있다. 범죄 도구가 방어 도구로 둔갑하는 슬픈 아이러니다. 그렇게라도 내가 나를 지켜야, 그렇게 두 눈 부릅떠야 살 수 있는 대한민국. 대검찰청의 ‘범죄분석’에 따르면, 2021년 흉악 강력범죄 피해자 중 여성 비율은 80%에 달했다.

7년 전 ‘강남역 살인사건’ 때 여성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울부짖었다. 그간 달라진 건 무엇인가. 당시 대전지역 ‘총대’로 일주일간 시위현장을 지킨 전설아(29)씨는 “여성을 바라보는 폭력적 시선과 사회구조가 바뀌기를 바랐는데 돌이켜보면 무력감이 든다. 정부가 도리어 페미니즘 ‘백래시(반동)’를 조장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일련의 ‘젠더폭력’ 원인을 가해자 개인에게서만 찾는 건 단선적 시선이다. 모든 건 연결돼 있다. ‘N번방’으로 상징되는 성착취, 만연한 성매매, 구조적 불평등 속에서 여성은 도구이고 멸시의 대상이다. 정치권은 ‘남녀 갈라치기’라는 간편한 프레임을 표 몰이에 이용한다. 여성 혐오를 조장하는 데 과연 책임이 없는가. 심지어 당당하게 “여성안심귀갓길 사업엔 남성 보호가 빠졌다” “페미니즘은 성 파시즘”(최인호 관악구의원)이라고 외치는 게 현실이다.

정부도 앞장서서 ‘여성’을 지운다. 윤석열 대통령은 ‘여성가족부 폐지’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고, 여가부의 수장은 이를 과업으로 여긴다. 정부 통계와 정책에서도 여성이 삭제된다.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은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으로 바뀌었고,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2023~2027)’에선 ‘여성폭력’이란 단어가 대거 소거됐다.

젠더폭력은 개인의 불운이나 우연한 피해가 아니다. 사회문제다. 페미니스트 연대에 공감하는 필진 11명이 쓴 ‘누가 여성을 죽이는가’(돌베개)에서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지적한다. “여성을 향한 폭력이 편견과 차별, 젠더 문제에서 비롯됐음을 탐색하고 인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대응 조치에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여성이라서 죽었다, 나는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고 자조하게 만드는 사회가 과연 정상인가.


김지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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