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發 일본행 노선 좌석 사실상 '완판'
젊은층, 과거사·사생활 구분 특성 반영
비용 부담도 적어 '실용성' 측면 인기↑
엄숙함 대신 '가치소비'로 광복절 기념
"연차를 써서 광복절에 가려고요. 일정이 짧은 해외여행은 일본이 제격 아니겠어요?"
직장인 김모(35)씨는 요즘 일본어를 맹연습 중이다. 광복절인 15일 두 친구와 일본 오키나와로 '호캉스(호텔에서 즐기는 바캉스)'를 떠나기 때문이다.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 당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가 특히 컸던 곳이지만, 여행지를 정할 때 그다지 거부감은 없었다. 김씨는 "굳이 유적지를 찾아다닐 계획은 없다"며 "공휴일을 끼워 넣어 연차를 아낄 요량으로 광복절에 출국표를 끊은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8월 15일은 한국인에게 애국 의지를 다지는 소중한 날이다. 평소 역사 문제에 큰 관심이 없어도 이날만큼은 괜히 숙연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최근 젊은이들은 여느 휴가철과 다름없이 'J-컬처'를 즐기러 일본행 비행기에 기꺼이 몸을 싣고 있다. "매국노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선에도 합리적 소비를 중시하는 2030세대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다. 그렇다고 아픈 역사를 마냥 외면하지는 않는다. 자신만의 '가치소비'로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2030이 견인하는 '광복절 日 여행'
10일 항공사 티웨이에 따르면, 8일 기준 이달 10~15일 한국발 일본행 항공권의 평균 예약률은 92%다. 노선별로는 인천~나리타, 인천~삿포로, 제주~오사카 예약률이 97%를 돌파하면서 사실상 '완판'을 기록했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시작된 2019년(70%)보다 22%포인트가 높고, 2018년(88%) 수치도 일찌감치 앞질렀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전 연령대에서 여행객이 늘었지만, 40대 이하의 관심이 특히 큰 편"이라고 귀띔했다. 광복절 일본행 수요 상당수를 청년층이 주도하고 있다는 뜻이다.
광복절에 이들을 일본으로 이끈 배경엔 '실용주의적 역사관'이 자리하고 있다. 과거사와 사생활은 구분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역사는 철저히 나와 맞닿아 있다"는 기성세대 사고와 차이가 있다. 실제 지난해 한국 동아시아연구원이 18세 이상 성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40세 이상은 과반이 "일본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다"고 답했다. 반면 그 이하 세대에선 "좋은 인상 또는 어느 쪽도 아니다"라는 답변이 절반을 넘었다. 김씨는 "광복절에 일본문화 소비를 지양해야 한다는 주장은 맹목적인 애국심 강요로 느껴진다"고 했다.
역대급 장기 '엔저 현상(엔화 가치 하락)'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청년들에게 떨칠 수 없는 매력이다. 2박 3일 일정으로 후쿠오카를 찾는 자영업자 이유정(30)씨는 "'노(NO) 재팬'을 지지했지만, 일정과 예산에 맞는 여행지를 찾는 게 더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대학생 오정우(27)씨는 "굳이 야스쿠니신사 같은 곳을 찾진 않을 것"이라면서도 "이젠 노 재팬 이슈가 크게 와닿지 않는다"고 말했다.
"SNS로 나만의 광복절 기린다"
물론 청년들이 일제 만행과 순국선열의 희생까지 폄하하는 건 아니다. 수익금 일부가 독립유공자 후손과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기부되는 물건을 사거나, 기념활동에 참여한 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동참 촉구 게시글을 올리는 것 역시 2030세대의 광복절 신(新) 풍속도다. 대학생 장모(25)씨는 "전시를 관람하고 독립운동가들에게 감사 메시지를 남기면 815원씩 기부가 되는 캠페인이 있길래 둘러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박은아 대구대 심리학과 교수는 "공동체적 가치를 중시하는 기성세대와 달리 개인의 욕구를 우선시하는 젊은 세대가 나름의 역사적 기념일을 기리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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