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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귀하신 몸'… 철 지나면 '폐기 신세' 백신

입력
2023.08.0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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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백신, 누적 도입량 10% 폐기
과거 신종플루, 독감 백신도 폐기
수급 예측 어려워… 자칫 백신 부족해질 수도

편집자주

즐겁게 먹고 건강한 것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요. 그만큼 음식과 약품은 삶과 뗄 수 없지만 모르고 지나치는 부분도 많습니다. 소소하지만 알아야 할 식약 정보, 여기서 확인하세요.

50대 연령층과 18세 이상 성인 기저질환자에 대한 코로나19 백신 4차 접종이 시작된 지난해 7월 18일 서울 성동구 한 이비인후과 의원에서 시민들이 백신을 접종하고 15분 동안 대기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50대 연령층과 18세 이상 성인 기저질환자에 대한 코로나19 백신 4차 접종이 시작된 지난해 7월 18일 서울 성동구 한 이비인후과 의원에서 시민들이 백신을 접종하고 15분 동안 대기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무엇이든 수요가 많을 땐 귀한 몸이더라도 수요가 사라지고 나면 찬밥 신세로 전락하기 마련입니다.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치는 백신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없거나 부족할 땐 발을 동동 굴렀다가도, 그 시기가 지나면 쳐다도 안 보는 게 바로 백신이죠.

코로나19 백신만 봐도 그래요. 코로나19 백신이 처음 도입됐을 당시엔 내가 맞고 싶어도 마음대로 맞을 수도 없었어요. 접종 시기는 물론 백신 종류까지 원하는 대로 골라서 맞을 수 없는 상황이었죠.

의료진과 노약자, 고위험군 등부터 접종이 먼저 이뤄져 일반 국민들은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어요. 일반 국민 대상 접종이 시작됐어도 생년월일에 따라 5부제로 예약을 한 뒤 접종받을 수 있었죠. 그 당시엔 예약 취소분 등 잔여 백신을 '줍줍'하는 사람을 셀 수도 없었을 정도로 백신 수요가 높았습니다.

코로나19 유행 4년. 지금은 어떻습니까? 백신이 있어도 안 맞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변이바이러스 확산에 따라 새로운 백신이 도입돼도 관심 밖입니다. 서서히 백신 인기가 떨어지더니 마스크 착용 의무와 확진자 격리가 권고로 전환된 지금은 정부에서 백신을 맞아달라고 권고해도 맞지 않는 실정입니다.

코로나19 백신, 6월까지 2186만 회분 폐기

화이자의 코로나19백신 462만5,000회분이 2021년 9월 22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들어오고 있다. 인천=뉴스1

화이자의 코로나19백신 462만5,000회분이 2021년 9월 22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들어오고 있다. 인천=뉴스1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질병관리청에서 확보한 '코로나19 백신 도입 및 폐기 현황'에 따르면 6월 말 기준 국내에 들여온 코로나19 백신은 누적 2억128만 회분이라고 해요. 백신을 처음 맞기 시작한 2021년에 가장 많은 1억1,891만 회분이 수입됐고, 지난해에도 7,884만 회분이 도입됐어요. 올해 상반기는 353만 회분으로 뚝 떨어졌습니다.

그 중 2,186만 회분(10.86%)이 유통기한 경과 등으로 폐기됐어요. 모더나가 1,348만 회분으로 가장 많았고, 일반 성인이 흔히 접종받은 화이자 백신도 630만 회분이나 폐기됐습니다. 그 외 △노바백스 157만 회분 △아스트라제네카 26만 회분 △얀센 13만 회분 △스카이코비원 12만 회분 등이 폐기됐어요.

폐기 물량은 점점 더 늘어날 겁니다. 방역당국이 10월부터 XBB 변이바이러스를 기반으로 한 백신 접종을 계획 중이니, XBB 기반 백신도 호응도가 낮다면 내년엔 잔여 물량이 또 폐기 수순을 밟겠죠.

신종플루 백신, 2500만 회분 중 695만 회분 폐기

쓰다 남은 백신을 다량 폐기하는 건 비단 코로나19 백신 문제만이 아닙니다. 2009년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신종인플루엔자(신종플루) 백신도 마찬가지였어요. 그해 하반기부터 신종플루가 삽시간에 확산하면서 확진자 속출로 휴교하는 학교가 생길 정도였습니다. 수능을 불과 한달 여 앞두고 신종플루가 유행하자 고3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불안에 휩싸이기도 했죠.

신종플루 예방 백신 접종이 실시된 2009년 11월 11일 서울 동대문구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백신 접종을 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신종플루 예방 백신 접종이 실시된 2009년 11월 11일 서울 동대문구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백신 접종을 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방역당국은 그 해 10월 말부터 서울성모병원과 고대구로병원 등 신종플루 주요 거점치료병원 7곳 종사자를 시작으로 의료진, 초중고교 학생, 영유아와 임신부 순으로 우선 접종을 시행했고, 이듬해 군인·노인·만성질환자, 일반 국민 순으로 접종받을 수 있었습니다.

신종플루에 대한 공포가 심했던 탓에 '백신 새치기'를 요구하는 웃지 못할 현상도 생겼어요. 가장 먼저 접종이 시작된 거점치료병원엔 후순위로 밀린 시민들의 전화가 쇄도한 건데요. "나도 먼저 백신을 맞게 해달라" "해외에선 우리도 우선접종 대상인데 지금 맞을 순 없느냐" "신종플루에 걸리면 당장 죽을 수도 있으니 백신을 맞게 해달라" 등 우선접종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한때는 너도나도 백신을 맞게 해달라고 했지만, 신종플루 발생이 잠잠해지자 백신 수요 역시 급감했습니다. 정부가 2009년 2,430억 원의 예산을 들여 신종플루 백신 2,500만 회분을 구입했다가 다음해 25만 회분을 폐기했고, 그 이듬해에도 670만 회분을 유통기한 경과로 폐기했습니다. 금액으로만 따지면 총 676억 원에 달합니다.

독감 백신도 남아 폐기… 신종 감염병, 백신 수요 예측 더 어려워

지난해 10월 18일 서울 중구 봉래동 서울역 다시서기희망지원센터 열린 서울시 노숙인 및 쪽방촌 주민 대상 무료 독감 예방접종 행사에서 의료진이 한 시민에게 독감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뉴스1

지난해 10월 18일 서울 중구 봉래동 서울역 다시서기희망지원센터 열린 서울시 노숙인 및 쪽방촌 주민 대상 무료 독감 예방접종 행사에서 의료진이 한 시민에게 독감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뉴스1

매년 맞아야 하는 독감 백신도 폐기되긴 마찬가지였어요. 특히 100% 수입에 의존하던 2005년엔 국내에 공급된 독감 백신이 3, 4개당 1개 꼴로 폐기됐다고 해요. 백신 공급 시차 때문입니다.

당시엔 백신 원액을 들여와 국내에서 포장단계를 거치는 식이었는데, 순차적으로 백신을 공급하다 보니 수요가 갑자기 몰린 시기에 일시적으로 백신 품절이 발생했는데요. 접종 시기를 놓쳤다고 판단한 시민들이 아예 백신 접종을 포기하면서 생긴 일이었어요. 백신을 국내에서 생산하기 시작한 2011~2015년엔 과잉생산으로 5년간 2,070만 회분, 1,400억 원어치가 폐기됐다고 합니다.

백신을 폐기하면 막대한 비용을 허공에 날리는 셈이니 정확한 수요를 예측하고 그 수요에 맞는 만큼만 도입할 수 있다면 참 좋겠죠. 하지만, 변수가 워낙 많다보니 정확하게 수요를 예측하는 게 쉽지 않아요. 특히 신종플루나 코로나19처럼 갑작스럽게 발생한 감염병일 경우, 누적된 접종 데이터가 없다 보니 예측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예상과 달리 백신 수요가 급증할 수도 저조할 수도 있거든요.

백신이 모자라게 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2020년 독감 백신 '백색입자' 사태가 대표적이에요. 당시 독감 백신 중 일부에서 이물질이 발견됐고, 일부 백신은 상온에 노출돼 총 106만 회분이 수거됐어요. 당시 정부가 2,959만 회분을 출하 승인했는데, 이중 100만 회분이 넘는 분량이 사라질 거란 예상을 누가 했을까요. 자칫 백신을 맞고 싶어도 맞을 수 없는 상황이 될 뻔했는데, 다행히 우려했던 백신 대란은 없었습니다.

적어도 국민의 건강과 안전에 관한 것이라면 부족한 것보단 넘치는 게 더 안전한 방법일 겁니다. 물론, 자원과 돈이 낭비되지 않도록 폐기량을 줄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요.

윤한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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