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하고 품위 있는 ‘디아스포라’ 정체성 표현
이미지 결합, 기존 정의·지식·믿음 뒤집는 질문
K컬처, 한국 감성·감각 자신 있게 풀어낸 'MZ세대'
주름이 깊은 노년의 동양인 여성이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한다. 찡그린 것인지 미소를 머금은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다. 선명한 눈매와 다문 입술에서는 강인함이 느껴진다. 금빛 귀걸이, 희고 긴 머리카락을 드러낸 데서도 자신감이 나타난다. 묘하게도 그에게는 여우의 귀와 꼬리가 달려있다. 무지갯빛 배경과 갈매기는 바닷가에 서 있는 듯한 그를 더 신비롭게 보이게 한다.
서울 강서구 마곡동 스페이스K에서 13일부터 열리는 제이디 차(40·한국명 차유미)의 개인전 ‘구미호 혹은 우리를 호리는 것들 이야기’에 전시된 회화와 설치미술 등 33점 가운데 하나인 ‘미래의 우리들’이다. 캐나다 교포 2세로 영국에서 활동 중인 작가는 한국의 전통설화를 모티프로, 주목받지 못해 왔지만 가치 있는 것들을 전면에 내세워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했다.
‘미래의 우리들’은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작품. 작품 속 인물의 오묘한 표정은 사회의 소수자지만 당당하고 품위 있는 ‘디아스포라’(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를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작품 속 인물이 한국 전래설화 구미호의 귀와 꼬리를 한 것은 이들의 삶의 지혜를 상징한 것이다.
이장욱 스페이스K 수석 큐레이터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 들었던 한국 전래 설화의 이미지를 캐나다 이민 2세 여성인 작가가 자신의 정체성에 덧대 미래의 모습으로 표현한 작품”이라며 “사회의 주변부 위치였던 나이든 여성을 당당하고 지혜로운 이미지로 표현해 존재의 고귀한 가치를 보여주려 한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그의 전시에서 주변부에 머물던 존재를 주인공으로 끌어낸 작품은 이뿐만이 아니다. 갈매기, 까마귀 등의 한국 전래설화 속 이미지를 혼종으로 결합해 권능한 존재로 보이게 했다. 그의 작품에 자주 나타나는 ‘반인반수’와 함께 이들을 존중과 숭배의 대상처럼 표현해 사회적 약자의 존재를 승격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그가 작품에서 여성들이 주로 쓰던 조각보, 배추김치 등의 이미지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특별하지만 하찮게 여겨진 존재를 결합해 표현함으로써 익숙한 이미지를 뒤집으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우회적 방식으로 기존의 정의, 지식, 믿음에 근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의 회화가 정교하고 섬세하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는 회화에 머물지 않고 설치미술, 행위예술까지 주제의식을 표현하는 넓은 작품활동을 한다. 그의 전시는 넓은 시야로 볼 필요가 있다. 제주의 창조신인 마고할미상이 해태상 위에 앉아 전시장 초입에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으며, 천장이 없이 위가 뚫린 전시장을 2층에서 바라보면 ‘조각보’와 같은 미로 형태를 띠고 있다.
주연화 홍익대 문화예술경영대학원 교수는 “해외 활동 작가가 한국 전통 소재를 사용한 컨템포러리아트(동시대 예술) 작업을 한다는 것은 K컬처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고, 거부감 없이 수용되는 시대란 뜻이기도 하다”고 평했다. 주 교수는 “한국의 민속 요소를 활용한 감성·감각적인 방식으로 서사를 풀어내면서도 주제의식은 뚜렷한 새로운 미술계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가 중견작가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다문화 시대 하이브리드 정체성을 수용하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세계 주요 미술관이 찾고 있는 혼성 문화 등 새로운 미술의 정체성에도 부합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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