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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서점, 방한 나무…엉뚱한 상상력으로 지어낸 詩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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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서점, 방한 나무…엉뚱한 상상력으로 지어낸 詩 세상

입력
2023.07.07 04: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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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의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
모래 서점을 문학 무대로 삼은 시집
별난 詩 세계 유랑하다 만나는 다정함

2016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문보영은 시집 ‘책기둥’ ‘배틀그라운드’ 외에도 소설 ‘하품의 언덕’, 에세이 ‘일기시대’ 등을 냈다. 손편지로 쓰는 문학 뉴스레터 ‘일기 딜리버리’, 시인의 일상을 담은 브이로그(Vlog) 등으로 독자들과 활발히 소통하는 대표적인 젊은 시인으로 꼽힌다. 문학동네 제공

2016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문보영은 시집 ‘책기둥’ ‘배틀그라운드’ 외에도 소설 ‘하품의 언덕’, 에세이 ‘일기시대’ 등을 냈다. 손편지로 쓰는 문학 뉴스레터 ‘일기 딜리버리’, 시인의 일상을 담은 브이로그(Vlog) 등으로 독자들과 활발히 소통하는 대표적인 젊은 시인으로 꼽힌다. 문학동네 제공

한번 상상해 보자. 서점인데 책장은 없다. 대신 바닥을 가득 채운 모래에 책이 파묻혀 있다. 천장의 나무판자 사이로는 모래비가 끊임없이 내린다. 움직이지 않고 책을 오래 읽으면 모래에 파묻히기 십상이다. 머릿속으로 그 모습을 그리다 보면 문득 의문이 든다. '세상에 이런 서점이 정말 있어?'

시인 문보영(31)의 신작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은 그런 서점을 무대로 삼은 시집이다. 엉뚱한 상상력을 한껏 발휘한 공간은 언제나 문보영 시 세계의 중심이었다. 등단 1년 만에 제36회 김수영문학상을 받게 한 첫 시집 '책기둥'(2017)은 도서관을, 두 번째 시집 '배틀그라운드'(2019)는 전쟁이 벌어지는 온라인 게임 속의 섬을 중심으로 전위적 세계를 펼쳐냈던 그다. 이번 세 번째 시집에는 시인의 별칭인 '기기묘묘 나라의 명랑 스토리텔러'(박상수 시인 겸 문학평론가)에 충실하게 써 내려간 시 47편을 수록했다.

문보영이 지어내는 세상은, 그러니까 시는, 통상의 이치(理致)를 깨는 데서 쾌감을 준다. 가령 표제작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에서는 제목을 안다고 책을 찾을 수가 없다. 모든 책이 "모래에 쓸려 제목이 지워지니까." 다시 생각해 보면 제목이 없다는 건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것이고, 무제의 책이 둘러싸인 곳은 꽤 근사한 공간일 수 있겠다. 또 서시인 '방한 나무' 속 세상에는 난방이라는 개념이 없다. 열을 내는 '방한 나무'를 껴안는 걸로 온기를 나눈다.

"식당은 당신이 가지 않은 길(음식 혹은 식당)을 음식값에 반영해요. (중략) 당신이 가지 않았지만 그 사람들은 음식을 만들고 있거든. (중략) 우리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해요. 그것이 우리 시대의 윤리랍니다." 토마토 오믈렛과 오렌지주스값이 '일억 삼천만 원'인 '캐셔'의 세계도 흥미롭다. 터무니없는 값의 이유는 그럴싸하다. 세 쪽짜리 긴 시를 거듭 읽고 읽다 보면 혹하는 순간이 온다. 시인의 세상이 집요한 관찰로 찾아낸 현실의 틈 사이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문보영 지음·문학동네 발행·156쪽·1만2,000원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문보영 지음·문학동네 발행·156쪽·1만2,000원


'계속살기의 어려움'이라는 동명의 시 2편은 '바나나 걸이에 걸린 바나나가 자신이 죽은 줄 몰라서 더 오래 산다'는 얘기를 바탕으로 한다. 시적 화자는 실제로는 걸이에 걸어둔 바나나의 썩는 속도가 느리지 않지만 "바나나가 상상하는 쪽을 응원한다"며 바나나 걸이를 사용한다. 겉으론 바뀌는 게 없을지라도 그 편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마음을 키울 수 있기에. 별난 세상(시)을 유랑하다 보면 이런 다정함을 종종 만난다. "내가 절대로 나 자신에게 적응할 수 없는"('적응을 이해하다') 인간을 보며 "조금 더 느리게 살 필요가 있다"고 바라는 시인이 썼으니까.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만들고 그 간극을 통해 삶의 속도를 늦추는, 시인의 일에 그는 전념했다. 덕분에 독자는 그 안에서 자유로움을 즐긴다.

마지막에 실린 '역자 후기'는 이 시집의 엉뚱함을 배가 시킨다. 시집의 해설이자 일종의 산문이고, 장시(長詩)처럼 읽히기도 한다. 한국 시인이 한국어로 쓴 시집에 역자의 등장이라니. 이는 문보영의 시집을 번역한 '역자 문보영'의 후기를 또 다른 번역가가 2차 번역했다는 설정 아래 작성됐다. 본문의 시들과 충돌하는 내용들도 재미를 더한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알 수 없는 혼돈이 이어지면 '에라 모르겠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즐기는 지경에 이른다.

이렇게 문보영의 신작을 이리저리 뜯어봤다. 그런데 사실 모두 거짓이다. 과감한 설계로 세워진 이 (시)집은 불가해하다. 기존의 논리로 풀기에는. 독자 개개인의 직관적 이해로 더 깊이 가닿을 수 있을 세계다. '역자 후기'의 '번역가 문보영'이 말했듯 ""시의 결미(結尾)는 만회야"라는 올리비아 페레이라의 말을 참고하면, 그(시인 문보영)는 한 번도 만회에 성공한 적이 없"다. 닫히지 못한 시는 무한히 열려 있다. "사고실험하며 지내요" 시집을 여는 페이지에 쓰인 이 문장을 모래 서점의 안내도처럼 움켜쥐고 책장을 천천히 그리고 무심히 넘기는 것만이 진실일지 모르겠다.

진달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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