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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검사→학력검사 변질된 수능, 재설계할 때" 창시자의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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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검사→학력검사 변질된 수능, 재설계할 때" 창시자의 진단

입력
2023.06.26 04:30
수정
2023.06.26 20:08
8면
0 0

박도순 고려대 명예교수 인터뷰
대학 서열·학계 반발에 학력검사화
킬러문항 없앤다고 사교육 못 잡아
교육 본질 논의해야 대입 제도 정립

1993년 8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이틀 앞두고 입시 학원에서 공부를 마친 학생들이 걸어나오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3년 8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이틀 앞두고 입시 학원에서 공부를 마친 학생들이 걸어나오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처음 설계됐을 당시의 수능과 지금의 수능은 완전히 다른 시험입니다. 현재 수능은 대학수학(修學)능력, 즉 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측정하는 게 아니라 (대입 당락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학력 검사와 비슷한 시험이 됐습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제도를 설계하고 1993년 처음 시행되는 과정을 주도해 '수능의 창시자'로 불리는 박도순(81) 고려대 교육학과 명예교수는 25일 한국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수능의 공정성보다 우선 논의돼야 할 것은 수능이 과연 무엇을 측정하고 있느냐는 것"이라며 현행 수능이 여러 외부 요인과 역학관계 개입으로 본래 의도했던 바에서 변질됐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킬러문항 배제' 방침으로 수능 출제방향 변경이 예고된 상황에서 수능의 '존재 이유'를 점검하고 정립하는 과정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는 것. 박 교수는 "조만간 시작될 입시제도 개편 논의도 교육의 목적과 기능과 같은 본질적 부분을 점검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고려대 교수 박도순

고려대 교수 박도순

당초 수능은 언어 능력과 사고력을 측정하는 '적성검사'로 개발됐다. 언어·수리·탐구 영역으로 나눠서 언어 영역은 대학 수업을 들을 수 있는 독해 능력을, 수리 영역은 지능검사와 유사한 방식으로 논리적 사고력을 재는 식이었다. 박 교수는 "대학입시에서 수능을 학생을 평가하는 참고 자료로만 쓰고, 대학이 자율적으로 논술이나 면접 평가를 통해 학생을 선발하는 구조를 의도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수능은 첫 시험부터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우리 학문이 빠져선 안 된다'는 학계의 반발이 과목 설계를 흔들었다. 과학계 요구로 탐구 영역에 과학이 들어가고, 과학이 들어가니 사회 탐구도 생겼다. 언어 영역은 국어시험이 됐고, 영어 실력도 측정해야 한다는 요구에 영어 영역도 추가됐다. 대학은 개별적으로 논술고사를 운영하기보단 수능 점수만으로 학생을 뽑기 시작했다. 박 교수는 "대학은 문제 출제와 채점 부담이 크고 문제가 생기면 책임져야 하니 국가에서 일괄적으로 평가 제도를 마련해주면 편하다고 여겼을 것"이라며 "입학생 수능 점수가 우수 학생 영입의 잣대가 되면서 학교 위상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25일 서울 목동 학원가의 모습. 뉴스1

25일 서울 목동 학원가의 모습. 뉴스1

킬러문항도 이런 맥락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박 교수는 강조했다. 박 교수는 "왜 국어 영역에서 비문학 지문을 가져다가 쓰냐는 등의 얘기가 나오지만, 원래 수능 목적에서 보면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했다. 박 교수는 "독해력을 측정할 때 단순히 국어 교과서에 있는 글을 잘 읽으면 독해력이 뛰어난 것인가"라고 반문하며 "교과서는 교육과정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자료일 뿐, 글은 어디서 가져오든지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얼핏 어려워보이는 교과서 밖 자료라도, 교육과정이 의도한 학력 성취 수준을 제대로 측정한다면 좋은 문제이며 그걸 무작정 '킬러문항'으로 치부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논란이 된 킬러문항들이 이런 수능 본연의 목적에 따른 것인지, 단순히 상위권 학생 점수 변별을 위해 복잡하게 출제된 것인지는 가려내야 한다. 박 교수는 "원래 목표한 것을 제대로 측정할 수 있다면 잘 된 문항이고 순전히 오답률을 높이기 위해서 꼬아서 냈다면 문제"라고 했다. 다시 말해 "출제자 의도와 문항 내용을 기준으로 논쟁을 해야지 '지문이 교과서에 없다' '대학 교수도 풀 수 없는 문제다'라는 식으로 논쟁해선 안 된다"고 했다.

2021년 6월 프랑스 동부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파스퇴르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바칼로레아를 치르고 있다. 스트라스부르 AFP=연합뉴스

2021년 6월 프랑스 동부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파스퇴르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바칼로레아를 치르고 있다. 스트라스부르 AFP=연합뉴스

박 교수는 킬러문항을 배제해 사교육 부담을 낮추겠다는 교육당국 방침에 회의적 입장을 밝혔다. "(킬러문항 배제가) 전체 사교육비를 올리고 내리는 데 결정적인 건 아니다. 학벌주의, 대학 서열이 존속하면서 경쟁을 강화시키는 한 사교육비 증가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수능의 역할을 재차 강조했다. "서열을 가를 수 없는 시험이라면 (사교육 부담이) 상당 부분 사라질 것"이라며 "지역별로 시험을 치르는 프랑스 바칼로레아처럼, 수능도 지역별로 본다면 대학에서 참고자료 정도로만 쓸 것"이라고 제안했다. 바칼로레아는 프랑스의 논술형 중등교육 졸업실험으로, 만점의 50% 이상을 받으면 대학 입학 자격을 주는 절대평가 방식이다.

교육부가 조만간 2028학년도 대입개편안을 발표할 예정인 가운데, 박 교수는 대입제도 개편에서도 포괄적 방향에 대한 논의가 우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대학을 능력주의 관점에서 엘리트 양성기관으로 볼지, 평등주의 관점에서 보편적 교양인을 기르는 기관으로 볼지부터 합의가 이뤄져야 절대평가냐 상대평가냐 같은 세부 논의도 가능해진다"며 "기본적 사항부터 세밀히 검토한 뒤에 입시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했다.



홍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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