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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된 범일 국사, 근데 부인은 또 뭐냐?

입력
2023.06.25 12: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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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현
자현스님ㆍ중앙승가대 교수
강원 삼척 영은사에 모셔진 범일국사진영. 월정사 제공

강원 삼척 영은사에 모셔진 범일국사진영. 월정사 제공

기독교가 천국을 소망한다면, 불교는 붓다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때문에 고승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붓다'라고 존칭되는 것이다.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 대사를 '금산보개부처님이 나투신 모습'이라고 한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 불교의 고승 중에는 깨달음이라는 각성을 통해 보통 사람과는 다른 신비한 능력을 갖춘 분들도 있다. 인간이지만 인간을 넘어선 어벤져스급 초인들, 바로 도선 국사나 무학 대사 같은 분들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민중에 의해 '신'으로 거듭난 고승도 있다. 그것도 유네스코에 의해 공식으로 인정받은 분이 있으니,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인 강릉단오제의 중심 신(主神·주신) 범일 국사다. 더구나 범일은 대관령 국사성황신까지 겸하는 신계의 2관왕이다.

범일은 통일신라 말기의 승려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해 선 명상을 배웠다. 이후 비범한 능력을 보이다 귀국해서, 고향인 강릉에 머물며 사굴산문을 확립한다. 중학교 교과서에서 봤던 구산선문 중 하나가 바로 범일의 사굴산문이다. 범일은 제48대 경문왕(871년)·제49대 헌강왕(880년)·제50대 정강왕(887년)의 국사 초빙을 거절한 희대의 고승이다. 이런 범일이 입적한 후에 민중들에 의해 강릉과 대관령을 수호하는 신으로 거듭난 것이다.

민간신앙에는 강함에 대한 추구와 깊은 의존이 있다. 이런 점에서 깨친 고승인 범일은 강함과 자비를 두루 갖춘 수호자가 되기에 충분했다. 마치 임진왜란 이후 사명당이 민중들에 의해 도술의 아이콘이 된 것처럼, 범일 역시 강원도 민중의 수호신으로 인식된 것이다.

대관령 무사통과를 기원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조상들은 단오에 맞춰 범일 국사를 모시는 대관령국사성황제를 지내 왔다. 사진은 2023년 강릉단오제 대관령국사성황제. 강릉시청 자료

대관령 무사통과를 기원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조상들은 단오에 맞춰 범일 국사를 모시는 대관령국사성황제를 지내 왔다. 사진은 2023년 강릉단오제 대관령국사성황제. 강릉시청 자료

강원도는 대관령을 중심으로 영동과 영서로 나뉜다. 그런데 지금은 대관령을 넘는 것이 별것 아니지만, 과거에 이 길은 험난한 죽음의 여정이었다. 특히 대관령에는 호랑이와 표범이 다수 서식했다는 점에서, 얼마나 위험한 행로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으리라. 지금이야 호랑이가 출현한다고 하면 바리바리 짐을 싸 와서 장사진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호환마마'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호랑이의 재난은 천연두와 더불어 치명적이었다. 얼마나 호랑이 피해가 심각했으면, 우리나라에 호랑이가 등장하는 속담만 130종 이상이 되겠는가!

더구나 강릉에서는 수도가 개경(고려)이나 한양(조선)이라면, 대관령은 무조건 통과해야만 하는 필수 코스였다. 이 때문에 대관령과 관련된 신앙이 번성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대관령 국사성황신 범일이다. 그러나 고승만으로 호랑이를 완전히 제압하기 어려웠다고 판단했는지, 또 다른 장군이 대관령 산신으로 소환된다. 그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명장 김유신이다. 즉 '대관령 국사성황신-범일'과 '대관령 산신-김유신'의 2강 수호체제가 갖춰진 셈이다.

이 중 범일은 강릉단오제의 중심 신도 겸한다. 이는 김유신이 정복자로 강릉 쪽에 온 것이 전부라면, 범일은 40여 년을 지역과 함께한 토박이 수호신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강릉단오제는 범일을 모시는 것으로 시작해 보내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선 후기가 되면, 대관령 국사성황신에 강릉에 살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정씨녀가 부인이 된다는 설화가 덧붙여진다는 점이다. 민중들은 범일 국사에게 정씨녀라는 부인을 만들어주는 해괴망측한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유교적인 관점에서는 제아무리 국사라도 결혼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한 것 같다.

고승인 국사에게 부인이라! 이보다 더 재밌고 창의적인 생각이 존재할 수 있을가? 이로 인해 오늘날 강릉단오제는 국사성황신과 더불어 국사여성황신이라는 두 신을 모시고 진행된다. 민중에 의해 만들어진 신, 그 끝판왕에 바로 범일이 위치해 있다.

자현 스님·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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