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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으로 기술 빼 '쌍둥이공장'까지… 큰돈 벌고 걸려도 90%가 벌금·집유

입력
2023.06.19 14:00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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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반도체 굴기의 현주소: ②성장방정식]
중국의 무차별 기술 빼가기 실태

편집자주

중국 반도체 기술이 한국을 맹추격 중입니다. 중국 반도체 수준은 어디까지 올라왔고 앞으로 얼마나 발전할까요? 미국과의 반도체 전쟁을 버텨낼 수 있을까요? 한국일보가 상세히 짚어봤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인 지난해 4월 대전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 부설 나노종합기술원을 방문해 반도체 웨이퍼를 살펴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인 지난해 4월 대전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 부설 나노종합기술원을 방문해 반도체 웨이퍼를 살펴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반도체 소재 관련 대기업 계열사의 팀장으로 일했던 김성진(55·가명)씨. 반도체 웨이퍼(원판) 연마 분야에서만 경력을 쌓았고, 업계에선 '대가'로 통하는 최고의 전문가였다.

그러나 2018년 그가 임원 승진에서 탈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업계에서 김씨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아직 원래 직장에 몸담고 있는 김씨가 중국 반도체 회사인 A사와 동업을 하고 있으며, 그를 따라 중국으로 가면 파격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풍문이었다.

김씨의 전문 분야는 웨이퍼를 굴곡 없이 매끈하게 만드는 연마 공정(CMP). 김씨를 노리고 접근한 A사는 웨이퍼 세정 기술만 보유하고 있어, CMP 전문가인 김씨의 도움이 절실했다. 결국 A사는 2019년 6월 김씨와 CMP 슬러리(연마에 쓰는 용액) 제조 동업을 약정하며, 기술을 이전받기로 했다. 이 약정이 체결된 시점은 김씨가 한국 회사에 여전히 재직하던 때다. 그는 A사와 약정을 다음해인 2020년 1월에야 한국 회사를 퇴직하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2020년 5월 김씨는 A사의 사장급 임원으로 특채됐다. 그가 중국으로 넘어간 전후에 과거에 함께 근무했거나 동종업계에서 평소 알고 지낸 한국 연구원 3명이 각각 부사장, 팀장, 팀원으로 채용됐다. 부사장으로 스카우트한 연구원은 국내 메모리 반도체 대기업 소속이었다.

삼성전자 홈페이지에 소개된 반도체 제조의 8대 공정.

삼성전자 홈페이지에 소개된 반도체 제조의 8대 공정.


중국으로 새 나간 국가핵심기술

문제는 이 과정에서 중국 기업으로 불법적인 기술 유출이 있었다는 점이다. 특허청과 검찰 등에 따르면, 김씨와 연구원 2명은 한국 기업의 CMP 슬러리 기술 자료를 빼내 사업계획 자료를 만든 뒤 이를 중국 업체인 A사에 제공한 것으로 확인됐다.

슬러리 기술만 빠져나간 게 아니다. 부사장급으로 이직한 대기업 연구원은 국가핵심기술에 해당하는 'CMP 공정 보안자료'를 휴대폰으로 촬영해 통째로 유출한 것으로 조사됐다. 국가핵심기술은 해외로 유출되면 안보나 경제 발전에 중대한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는 기술로, 산업기술유출방지법으로 보호된다. 중국 회사가 한국 기술을 빼내 해당 공정을 자국화하면, 장기간 거액의 연구·개발(R&D) 비용을 들인 국내 기업은 국제시장 점유율을 빼앗기며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입게 된다.

이후 실제 중국 현지엔 한국의 '원조 공장'과 유사한 설비를 갖춘 공장이 구축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김씨는 아예 따로 현지에 법인을 차려 지방정부로부터 1,000억 원의 투자를 받을 계획도 세웠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순조로울 것 같았던 이들의 '쌍둥이 공장' 설치 계획은, 연구원 일부가 국내 회사에서 퇴사하는 과정에서 발각됐다. 김씨 등 일당 5명은 산업기술유출방지법 위반 등 혐의로 국내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최근 5년간 산업기술 해외 유출 건수. 그래픽=김문중 기자

최근 5년간 산업기술 해외 유출 건수. 그래픽=김문중 기자


대륙 향하는 연구원·엔지니어들

김성진씨 사례는 불법 기술 유출이 의심되는 경우지만, 스카우트 과정의 합법·불법을 가리지 않고 중국 반도체 기업에선 한국인 연구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일보가 중국 선전에서 만난 한 현지 업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 공장이 하나도 없는 허페이(合肥)의 국제학교에만 한국인 아이들 80명이 있다"며 "갑자기 허페이에 한국 교민이 늘어 이를 이상하게 여긴 상하이 영사관이 그 지역 국제학교를 조사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안후이성 허페이는 D램 분야 선도기업인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가 있는 곳. 결국 중국 반도체 회사에 취직한 한국인의 자녀가 현지에서 국제학교를 다니는 것으로 추정된다. 본보에 이 소식을 전한 관계자는 "CXMT뿐 아니라 디스플레이회사인 BOE에도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출신 한국인이 꽤 많은 걸로 들었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16일 중국 선전 세계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인공지능(AI) 반도체 세미나. 선전=안하늘 기자

지난달 16일 중국 선전 세계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인공지능(AI) 반도체 세미나. 선전=안하늘 기자

한국인 반도체 기술자들의 중국행이 급증한 것은 중국이 본격적으로 '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직후인 2017년과 2018년쯤이라고 한다. 당시 중국 기업들은 국내 대기업 연구원에게 '연봉 3배, 3년 근무'를 보장해 준 것은 물론이고, 가족이 거주할 아파트와 자녀의 국제학교까지 알아봐줬다. 임원 승진이 어려운 40대 중후반 직원들 중에 중국행을 고민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올해 반도체 경기가 꺾여 보너스가 급감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래서 인력 유출이 더 많아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중국은 임원길이 막힌 부장·팀장급 중견 간부를 주로 노리지만, 한국 반도체 회사에서 고위 임원을 지낸 '대어급'에게 은밀히 접근하기도 한다. 검찰은 이달 12일 삼성전자 전무, SK하이닉스 부사장을 거친 최모(65)씨를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반도체업계 권위자로 알려진 최씨는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공장 설계도와 공정 배치도 등을 빼돌려 중국 시안 삼성전자 공장에서 불과 1.5㎞ 떨어진 곳에 '복제공장'을 세우려한 것으로 조사됐다. 최씨는 중국에서 활동하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출신 인력 200여 명을 영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익명을 요구한 현지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하이닉스 부사장, 삼성전자 전 사장 등 굵직굵직한 고위급 인재부터 중간 관리자급까지 상당수가 이미 중국 반도체 기업에서 자리를 잡았다"며 "이들을 연줄 삼아 국내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려는 인력도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美 제재 이후 더 교묘해진 유출 시도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직접적으로 제재하기 시작한 이후, 중국 기업이 한국 인재를 빼내려는 시도가 더욱 과감해지고 있다. 중국 기업이 국내에 아예 연구·개발(R&D)센터를 세워 한국 연구원들을 채용하거나, 국내 기업 지분을 사들여 경영권을 장악하는 방식으로 기술을 빼내는 사례도 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원들이 직접 중국 현지 기업으로 건너갈 경우, 국정원이나 검찰의 수사 대상에 오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아예 국내에 연구소를 만들거나 지분을 사들이면, 당국의 수사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데다 더 우수한 인력을 쉽게 끌어들일 수 있다.

성남 판교 테크노밸리 전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성남 판교 테크노밸리 전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실제 최근 경기 성남시 판교 일대에 중국 기업의 R&D 센터 여러 곳이 생겨 업계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들은 국내 연구원들에게 접근해 2배 이상의 연봉을 제시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이 개발한 반도체 기술은 고스란히 중국 기업으로 흘러가지만, 이런 방식의 채용은 해외 기업의 국내 투자라서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국내 기업에서 연구진이 특허를 출원하면, 중국에서 동일한 특허를 출원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한 수사당국 관계자는 "연구진은 국내에서 일하기 때문에 해외로 연구 성과물이 유출된다고 의심하지 못한다"며 "심지어 한국 정부에서 연구개발자금을 보조 받은 기술이 흘러나가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해외 기술유출 범죄, 처벌 강화해야"

기술 유출 사건이 끊이지 않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유출로 얻는 이득'에 비해 처벌이 미약한 것이 중요한 원인이 된다는 지적이 많다. 국가핵심기술 해외유출 법정형은 징역 3년 이상 최대 30년까지, 영업비밀 해외유출 법정형은 최대 징역 15년까지 규정돼 있지만, 2019~2022년 사이 선고된 기술유출 사건(445건) 중 실형이 선고된 사건(47건)은 10.6%에 불과했다.

기술을 빼돌리다 걸려봤자 대부분 징역형의 집행유예나 벌금형 선고를 받기 때문에, 업계에서는 아예 "나중에 잡히더라고 큰 돈을 받고 기술을 넘겨주는 게 남는 장사"라는 말까지 나온다고 한다. 특허청과 대검은 4월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기술유출범죄 양형 기준을 강화해 달라는 의견을 넣었고, 양형위는 영업비밀 국외 누설 등에 관한 법정형 상향 등 지식재산권 양형기준을 수정하기로 했다.

처벌 강화 외에 반도체 인재를 국내에 잡을 여건이 조성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혁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지금은 말 그대로 '기술전쟁' 중이니 분명 해외 기술 유출에 대한 제한이 필요한 상황은 맞다"면서도 "다만 적절한 보상도 없이 첨단기술을 보유한 인재들의 이동을 막는다면 안그래도 외면 받는 이공계로 올 사람들이 더 줄어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도 "연구원에게도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는데 해외로 이직했다고 해서 모두 범법자로 볼 수는 없는 것"이라며 "너무 넓게 규정된 국가핵심기술의 범위를 보다 명확하게 정의해 확실하게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현주 기자
선전= 안하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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