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상승률 급락세, 2%대 가시권
효자 노릇 유가, 감산에 반등 조짐
가격 인상에 내성... 고착화 가능성
인플레이션이 끝나 가는 것일까. 3%대로 내려온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한국은행 목표치인 2%를 향해 급락 중이다. 낙관하기는 이르다. 경로가 추세대로 이어지리라 믿자니 이제 한 뼘 나아가기 힘든 첩첩산중 적진(敵陣)에 접어든 데다, 눈앞에 안개마저 자욱하다.
①착시
최근 통계청이 공개한 5월 소비자물가 상승률 3.3%는 19개월 만에 최저치인데, 여기에는 1년 전보다 18.0% 내린 석유류의 기여가 무엇보다 컸다. 전체 수치를 1%포인트 가까이 끌어내린 게 유가 하락이다. 이 요인이 없었다면 상승률은 여전히 4%대일 터였다.
문제는 지표ㆍ현실 간 괴리다. 물가 상승률은 1년간 물가가 얼마나 올랐나를 의미한다. 비교 대상이 지난해 같은 달이다. 작년 5월은 유가 급등기였다. 상승폭이 전년 대비 34.8%에 달했다. 치솟을 대로 치솟은 이례적 가격과 견주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플러스(+)가 되기 힘든 게 올 5월 상황이었다. 물가가 잠시 2%대로 낮아질 수 있지만 연말에는 다시 3% 안팎 수준이 되리라고 한은이 예상한 이유 중 하나도 유가 하락 기저효과의 소진이다.
더욱이 국제 유가 전망도 밝지 않다.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의 추가 감산 결정이 경기 침체 등 하방 요인을 견디며 유가 상승을 견인해 낼 수 있을지는 알기 어렵지만 적어도 하락은 방어하리라는 게 대체적 관측이다. 물가 관리에는 악재일 수밖에 없다.
착각도 장애물이다. 상승률 둔화는 덜 오른다는 뜻이다. 속도가 느려졌을 뿐 방향이 바뀌어 물가가 내려가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장기화한 고물가에 이미 얼마간 적응한 사람들이 더 둔감해질 경우 대(對)인플레이션 전투의 동력이 약해질 수 있다.
②복병
도사린 복병도 적지 않다. 일단 공공요금이다. 전체 물가 상승세가 많이 죽은 지난달에도 전기ㆍ가스ㆍ수도 가격은 23.2%나 올랐다. 그 와중에 각 지방자치단체(지자체)의 공공요금 인상 변수가 대기하고 있다. 중앙정부의 공공료 동결 권고 기한인 상반기가 지나가면서다. 상당수 지자체의 지하철ㆍ버스ㆍ택시 등 대중교통요금 조정이 임박한 분위기다.
정책 금리가 정점을 찍은 듯하다는 판단은 자산시장을 들썩이게 만들고 있다. 최근 코스피가 약 1년 만에 2,600선을 돌파하며 증시 회복 기대감이 커진 가운데, 대기성 자금인 투자자예탁금 규모도 돌아오는 기색이다. 부동산 가격도 정부 규제 완화가 포개지며 작년 하반기부터 오름세를 되찾는 양상이다. 주택값 상승은 47개월 만에 전월 대비 마이너스(-)를 기록한 집세의 추가 하향을 막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수출 부진에도 크게 타격을 받지 않는 모습인 고용시장은 고금리 압박 약화, 자산시장 강세와 함께 물가 상승을 부추길 공산이 크다. 소득이 늘어 커진 소비 여력이 수요를 부풀리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임금 상승 비용은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 가격 인상을 통해 소비자에게 전가되기 십상이다.
기후변화도 물가에 악영향을 줄 개연성 있다. 유가와 더불어 당국이 꼽는 주요 불확실성이 기후 위기다. 당장 이상가뭄 탓에 폭등한 미국 소고기 가격의 파장이 햄버거 같은 국내 가공식품 물가에까지 미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③근원
고물가 해소의 걸림돌은 반등뿐만 아니다. 5월 물가 동향을 평가하며 한은이 짚은 사실은 근원물가 상승률의 둔화 흐름이 여전히 더디다는 것이다. 한은이 통화정책 방향을 정할 때 중요하게 보는 지표가 가격 변동성이 큰 식료품ㆍ에너지 품목을 빼고 산출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방식 근원물가인데, 이 지표가 고착화할 조짐을 보인다는 지적이었다. 실제 올 들어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9%포인트 내려가는 동안 근원물가 상승폭은 0.2%포인트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근원물가가 끈적한(sticky) 것은 기업의 이윤 추구 속성 때문에 애초 대부분의 제품 가격이 일단 오른 뒤에는 좀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로나19 대유행과 우크라이나 전쟁이 공교롭게 겹치는 바람에 국제 원자잿값이 급등했고, 고물가를 어느 정도 불가피한 일로 받아들이는 소비자의 심리 때문에 기업에 가해지는 가격 인하 압력이 더 줄었다는 분석이다.
저성장 경고음이 커지는 데도 정부가 경기 부양에 적극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기획재정부 당국자는 6일 “상승률 수치가 내려와도 다시 튀어 오르지 않는다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는 물가 안정에 최우선 순위를 둘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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