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스러운 느낌 드는 백선의 꽃
레몬과 박하와 계피를 버무린 야릇한 향
스페인 백선은 멸종 위기…소유욕 버려야
편집자주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이 격주 월요일 풀과 나무 이야기를 씁니다. 이 땅의 사라져 가는 식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허 연구원의 초록(草錄)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뿌리가 봉황을 닮았다고, 약초 좀 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봉황삼 또는 봉삼이라는 이름으로 꽤 유명한 식물이 있다. 그 식물의 진짜 이름은 백선이다. 동의보감과 중국의 문헌은 뿌리에서 양고기 누린내가 나서 백양선(白羊鮮)이 백선이 된 것이라고 기록했다. 뿌리껍질을 약으로 쓰기 때문에 정식 약재명은 백선피다. 주로 피부 치료제로 쓰는데 달여서 환부를 씻어내거나 가루를 내어 환부에 붙이라고 약전은 설명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백선 뿌리로 담근 ‘봉(황)삼주’가 강장제라는 말이 미신처럼 떠돌기 시작했다. 최근 SNS를 타고 부쩍 더 번진 것도 같다. 1998년 그 담금주를 복용한 후 간이 심각하게 손상된 사례를 한의학계에서 발표했다. 백선은 독성이 있어 식품의 원료가 될 수 없으니 담금주로 먹지 말라는 식약처의 애원이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뿌리를 무단 채취하는 일이 꾸준히 발생하고 있어 우리나라 백선은 점점 보기 드문 식물이 되어가고 있다.
백선의 꽃은 아름답고 신비롭고 어딘가 모르게 신령스러운 느낌이 감돈다. 그래서인지 바쁘게 식물 조사를 하다가도 만개한 백선을 만나면 반사적으로 동작을 멈추게 된다. '와아' 탄성을 내뱉고 나서야 서둘러 카메라 앵글에 그 자태를 가둔다. 지난주 속리산 자락 어느 숲에서 식물 조사를 하다가 우연히 마주한 백선 앞에서도 그랬다. '찬란하다, 찬란해' 혼잣말하며 카메라의 뷰파인더에 한쪽 눈을 고정한 채 검지로 셔터를 눌렀다.
난초를 닮은 것도 같고 나비를 닮은 것도 같은 그 피사체가 오롯이 SD카드에 복제되는 동안, 별안간 내 코의 말초신경이 반응한다. 캘 때 맡으면 누린내가 난다지만, 땅 위로 드러난 백선의 몸에서는 향취가 난다. 같은 혈통의 운향과 식물인 감귤나무와 상산과 산초나무를 섞은 향, 그러니까 레몬과 오렌지와 박하와 계피를 버무린 야릇한 향이다. 그 냄새는 백선 몸속에 든 정유(精油) 성분 때문이다. 오돌토돌하게 사마귀처럼 돋아난 샘털이 빽빽하게 꽃차례 전체를 덮고 있다. ‘향기샘’과 같은 그 끈적끈적한 털에서 나온 방향성 물질이 계속 내 코끝에 닿는다. 향수의 원료로 쓰기도 하는 식물의 정유는 말 그대로 진짜 휘발성의 기름이다. 그래서 백선 몸에 불을 갖다 대면 샘털 속 혼합물이 촉매제가 되어 꽃대 자체에 불이 붙는다. 홀랑 다 타는 게 아니고 섬광처럼 몇 초간 불꽃이 이는 것이다. 테르펜, 쿠마린, 페닐프로파노이드와 같은 몸속 물질이 뒤섞여 연소 반응을 일으키는 것.
그래서 서양에서는 백선을 ‘가스식물’ 또는 ‘불타는 덤불’이라고 부른다. 1753년에 백선속(Dictamnus)을 처음 기록한 당대 최고의 식물분류학자 린네가 자신의 어린 딸이 우연히 서양백선에 불을 갖다 대었는데 꽃이 화르르 타오르는 걸 보고 이름을 붙였다는 일화가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불타는 떨기나무’가 서양백선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와 그 근거가 빈약하다고 맞서는 학자도 있다.
지구상에 자연적으로 자라는 백선은 3종이다. 한반도를 비롯하여 중국 동북부 지방과 극동 러시아와 몽골 일대에 사는 백선, 지중해 근방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에 사는 서양백선, 이베리아반도 동부 지방에 사는 스페인백선. 그중 서양백선은 대표적인 정원식물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다양한 품종이 개발되어 있고, 증식해서 보급할 수 있는 시장도 갖춰져 있다. 동양에서는 백선을 아주 먼 과거부터 약재로 이용했다. 뿌리를 캐서 쓰다 보니 전보다 많이 백선을 볼 수 없는 건 사실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약용식물로 일부 재배도 하고 여러 나라를 넘나들며 비교적 넓게 분포하고 있어 아직은 멸종을 우려할 단계는 아니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식물을 무단 채취하는 속도가 식물 스스로가 개체를 늘리는 속도를 앞지르면 사정은 급변한다. 스페인백선은 그래서 멸종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40여 가지가 넘는 질환을 다스리는 광범위 치료제로 기원전부터 각광받은 식물. 잎과 뿌리로 술을 담그는 일이 인기를 끌며 최근 자생지가 급격히 더 줄었다. 집에 가져가지 말고 (제발) 자연에 그대로 (좀) 두라고 스페인은 법으로 지정해 스페인백선을 보호한다. 이건 바다 건너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연하게 백선을 만나거든 그 눈부신 꽃향기에 취해도 좋다. 파르르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은 그 모양에 넋을 잃어도 괜찮겠다. 다만 한 생명을 소유하겠다는 욕심만은 부리지 말자. 우리의 소유욕은 서둘러 우리의 서식지를 망가뜨리는 재앙으로 되돌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의 터전을 지키는 일에 가장 서툰 생물은 아마도 인간일 거라고 수군대는 백선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허태임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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