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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의 재탄생, 다시 국경을 넘다

입력
2023.05.25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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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 ⓒ게티이미지뱅크

이탈리아 로마 ⓒ게티이미지뱅크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여행은 시작되었다. 몇 년을 숨죽여가며 버티던 숙박업소들은 오랜만에 밀려드는 예약에 슬금슬금 요금을 올렸다. 동네 주민만으로 연명하던 식당에는 관광객이 넘치고, 외지인이 없어서 사라진 줄 알았던 소매치기도 슬며시 나타났다. 국경을 넘는 사람들을 따라 낯선 것들이 흐르는, 여행의 시간이다.

에스프레소 종주국을 자부하며 마지막 보루처럼 지키던 로마에도 '마침내' 스타벅스가 문을 열었다. 밀라노에 첫 매장을 열었을 때 온 나라가 떠들썩하며 보이콧 움직임까지 일었던 게 벌써 몇 년 전. 더운 여름 시원한 커피를 찾아 헤매던 관광객들은 살짝 편해졌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이탈리아 바리스타들의 마음은 좀 더 불편해졌다.

유난히 음식에 보수적인 이탈리아 사람들이 전통을 말하며 눈살을 찌푸리는 것들이 있다. 감히 파인애플을 올리냐며 기겁하는 하와이안 피자나 본토에선 팔지도 않는다는 미트볼스파게티, 계란노른자 대신 크림을 범벅한 '가짜 까르보나라' 같은 음식들이다. 하지만 세상을 다니다 보면 무엇이 '진짜'인지 선을 긋는 게 더 어려울 때가 많다.

국경을 넘나드는 음식에 처음 관심을 가진 건 15년 전 아르헨티나에서였다. 들판에서 자유롭게 풀만 뜯어먹고 자란 소들을 한국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가격으로 먹을 수 있단 건 알고 있었지만, 어딜 가나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맛있는 젤라토를 만날 수 있다는 건 뜻밖의 발견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아이스크림이 맛있을까라는 사소한 질문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을 향하는 배를 탔던 이민자들에게로, 또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게 만든 남부 이탈리아의 절망적인 가난으로 이어졌다. 오랜 세월 사방에서 침략을 받으며 식민지 수탈을 겪고, 중농주의 실패로 북부 이탈리아가 누린 무역과 금융업의 성공에서는 멀어진 남부 이탈리아 사람들의 마지막 선택지가 아메리카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남미와 미국으로 떠난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후손이 이제 6,000만 명. 이탈리아의 아침식사 '코르네토'는 아르헨티나에서 반달모양 빵 '메디아루나'가 되었고, 밀라노의 명물요리 '코톨레타'는 아르헨티나 동네식당의 간판메뉴 '밀라네사'가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영혼을 담은 탱고 음악의 거장 푸글리에세 역시 이탈리아어로는 풀리에제(Pugliese), 이탈리아 남부지역 '풀리아 출신'이라는 뜻의 성씨다.

어쩌면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만들어낸 '가짜 파스타' 미트볼스파게티는 맘 놓고 먹을 만큼 고기가 풍족한 아메리칸 드림을 대변하는 음식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제일 유명하고 오래된 피자가게에 갈 때면 가끔 상상했다. 이렇게 양껏 쌓아 올린 피자 토핑은 무사히 가난에서 벗어났다는 이민자들의 자축 같은 건 아니었을까? 나폴리 피자협회가 만든 엄격한 규정에 따르면 '가짜 피자'에 불과할 테지만 말이다.

유럽을 침공한 오스만 군대는 뜨거운 모래에 커피가루를 탄 주전자를 올려 보글보글 끓이는 세계 최초의 커피 문화를 남기고 떠났다. 여기에 어떤 기발한 이는 진공포장을 도입하고, 또 어느 나라 과학자는 인스턴트 커피를 발명하고, 또 어떤 이는 고압으로 추출하는 기계를 개발하면서 점점 최고의 커피가 되어갔다. 커피가 처음부터 에스프레소가 아니었듯, 만나고 더하고 사라지며 우리 세상도 한 걸음씩 진화하나 보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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