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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잎 떨어지듯 몰락하는 한 시대… 체호프의 매력 속으로

입력
2023.05.12 10:0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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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연극 '벚꽃 동산'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국립극단의 연극 '벚꽃 동산'. 국립극단 제공

국립극단의 연극 '벚꽃 동산'. 국립극단 제공

대중이 가장 사랑하는 극작가는 단연 셰익스피어일 것이다. 그에 견줄 만한 극작가를 꼽는다면 아마도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가 제일 먼저 거론될 것이다. 실제 그의 4대 장막 희곡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 자매', 그리고 '벚꽃 동산'은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수많은 버전으로 공연됐고 다양한 장르로 옷을 갈아입기도 했다. 특히 연극인의 체호프 사랑은 유별나다.

체호프 작품의 인물들은 셰익스피어의 영웅들처럼 극적인 위기를 맞거나 스펙터클한 사건에 휘말리지 않는다. 체호프의 인물들이 품는 소시민적 욕망은 종종 어긋나고 가장 극적인 시간은 무대 밖에서 일어난다. 작품의 주인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등장인물 모두에게 개별성을 둬 각 인물의 서사를 세심하게 드러내고 유려하고 리드미컬한 대사 속에 심오한 의미를 담아낸다. 체호프는 막연한 희망을 제시하기보다 진실한 삶을 직시하려고 애썼다. 그의 작품이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연극인의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다.

세밀한 인간관계와 삶의 페이소스가 짙게 묻어나는 인물을 희극적 톤으로 그려내기 때문에 체호프의 무대화는 무척 까다롭다. 자칫 인물 간의 섬세한 관계가 무너지면 체호프의 매력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극으로 변하기 십상이다. 국립극단 김광보 예술감독이 연출한 '벚꽃 동산’은 오랜만에 체호프의 매력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체호프의 4대 희곡 중 ‘벚꽃 동산’은 그가 사망한 해에 집필된 작품으로 사후에 무대에 올랐다. 작품은 새로운 시대의 변화 속에 몰락해 가는 귀족 가문의 풍경을 담았다. 한때 막대한 부와 영광을 누린 귀족 가문의 라네프스카야(백지원)는 모든 것을 잃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곳에는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벚꽃 동산이 있다. 그는 막대한 은행 빚을 지고 있지만 호사스러운 생활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돈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도움을 구하는 요청에 지갑을 열며 경제 상황과 상관없이 파티를 기획한다. 라네프스카야에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벚꽃 동산에 건물을 지어 임대업을 한다면 빚을 탕감하고 어느 정도의 생활은 가능하다. 농노의 자식이었지만 신흥 사업가로 성장한 로파힌(이승주)이 해결책을 제안하지만 라네프스카야는 대답을 미루며 상스럽다는 이유로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벚꽃 동산은 경매로 넘어가고 로파힌이 이를 사들이면서 라네프스카야 가족 모두는 그곳을 떠난다.

'벚꽃 동산'은 한 몰락 귀족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대대로 막대한 부와 영광을 누린 귀족 가문이 신흥 사업가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시대적 변화의 풍경을 담았다. 원작 희곡에서는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벚꽃나무가 도끼에 찍히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막을 내린다. 김광보 연출가는 한 시대의 쓸쓸한 퇴장을 품위 있게 그려 내려고 애썼다. 극의 마지막 노쇠한 하인 피르스는 모두가 떠난 저택에 홀로 남아 읊조린다. “다 떠나버렸어. 나를 잊었군...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 아무것도. 허허. 바보 같네." 피르스는 농노 해방 후에도 스스로 하인이 되어 평생 귀족을 모시며 살았던 집사다. 라네프스카야와 더불어 그 시대를 상징하는 피르스의 독백에 벚꽃 잎이 날리며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한 시대의 퇴장이 시각적으로 표현된다.

국립극단의 연극 '벚꽃 동산'. 국립극단 제공

국립극단의 연극 '벚꽃 동산'. 국립극단 제공

신흥 사업가인 로파힌은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종종 세속적인 면이 강조되기도 하는데, 이승주의 로파힌은 합리적이면서도 라네프스카야에 대한 마음을 적절한 선을 유지하며 현실적 욕망과 연민 속에서 갈등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승주는 라네프스카야에게 향하는 마음을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을 정도로 드러내지 않다가도 순간순간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마음을 은근하게 잘 표현했다.

무엇보다도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귀족 가문을 상징하는 라네프스카야 역의 백지원은 다른 선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평온을 가장한 채 침몰하는 귀족 역할을 훌륭히 표현한다. 품위 있는 태도를 유지하다가도 히스테리처럼 평온의 균열을 일으키는 진폭 있는 연기로 몰락의 끝에 선 위태로운 인물을 잘 표현했다.

잘 짜인 트러스에 유리로만 이루어진 라네프스카야의 저택이 무대의 전부다. 건축물은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특히 집 안 한가운데 걸려 있는 화려한 샹들리에는 지난날의 영광을 상징하는 듯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떠나자 유리와 철골 트러스만 남은 구조물은 공허하고 피폐한 느낌을 준다. 한 시대의 몰락을 보여주기에 적절한 무대였다. 공연은 명동예술극장에서 28일까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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