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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밤꽃을 제대로 본 적 있나요?

입력
2023.05.08 04:30
수정
2023.06.01 17:22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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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무에서 수꽃·암꽃이 따로 피는 밤나무
별난 냄새 내뿜는 수꽃 향기에 ‘어질어질'
그사이 밤톨 완성하는 암꽃 피어나

편집자주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이 격주 월요일 풀과 나무 이야기를 씁니다. 이 땅의 사라져 가는 식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허 연구원의 초록(草錄)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샹들리에처럼 드리운 건 밤나무의 수꽃이다. 꽃가루를 옮겨줄 곤충을 부르기 위해서 비릿한 향을 낸다. 밤나무는 대표적인 밀원 식물인데, 10그루가 모이면 약 2.7kg에 달하는 꿀을 빚을 수 있다. 이하 사진은 허태임 작가 제공

샹들리에처럼 드리운 건 밤나무의 수꽃이다. 꽃가루를 옮겨줄 곤충을 부르기 위해서 비릿한 향을 낸다. 밤나무는 대표적인 밀원 식물인데, 10그루가 모이면 약 2.7kg에 달하는 꿀을 빚을 수 있다. 이하 사진은 허태임 작가 제공

밤나무의 꽃향기는 강렬하다. 시인 조태일은 '밤꽃들 때문에'라는 시에서 그 향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엎치락뒤치락 뒤엉켜/ 콸콸콸 쏟아내는 정액들 향기에/취한 벌나비떼들도/어질어질,” 김광규 시인은 이렇게도 썼다. “술잔처럼 오목하거나/ 접시처럼 동그랗지 않고/양물처럼 길쭉한 꼴로/밤낮없이 허옇게 뿜어내는/밤꽃 향기”

그렇다. 포유류 수컷의 정액과 비슷한 냄새가 밤꽃에서 난다. 누군가는 코를 쥐기도 하고 누군가는 얼굴을 붉힐지도 모르겠다. 밤나무는 수꽃과 암꽃이 한 나무에서 따로 핀다. 특유의 향기를 풍기며 길쭉한 꽃차례를 축축 드리운 건 수꽃이다.

샹들리에처럼 드리운 건 밤나무의 수꽃이다. 꽃가루를 옮겨줄 곤충을 부르기 위해서 비릿한 향을 낸다. 밤나무는 대표적인 밀원 식물인데, 10그루가 모이면 약 2.7kg에 달하는 꿀을 빚을 수 있다. 사진은 밤나무 수꽃을 확대한 것.

샹들리에처럼 드리운 건 밤나무의 수꽃이다. 꽃가루를 옮겨줄 곤충을 부르기 위해서 비릿한 향을 낸다. 밤나무는 대표적인 밀원 식물인데, 10그루가 모이면 약 2.7kg에 달하는 꿀을 빚을 수 있다. 사진은 밤나무 수꽃을 확대한 것.

하지만 밤톨을 완성하는 건 수꽃이 아니고 암꽃 아니던가. 사람들은 암꽃을 모른 채 밤꽃이 피는 6월의 그 얼마간의 시간을 통과한다. 별난 냄새에 ‘어질어질’ 주로 수꽃의 향기를 흡입하면서 샹들리에처럼 늘어진 수꽃의 요란한 자태에 눈길을 주면서 말이다. 나뭇가지의 가장 안전한 곳에 숨어서 씨앗이 될 밑씨를 품은 채 피는 암꽃의 존재는 잘 알지 못한다.

씨앗이 되기 전 단계를 일컫는 용어는 ‘밑씨’다. 씨앗으로 온전히 영글기 전에 밑씨는 절대 식물체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다. 가만히 웅크린 채 씨방 안에 들어 있다. 난자가 사람 몸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밑씨를 씨방이 온전히 호위하고 그 씨방을 꽃받침이 꽁꽁 싸고 그 둘레에 꽃잎이 달리고… 우리가 암꽃이라고 부르는 것은 밑씨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식물의 생식기관 전체를 가리킨다.

밤나무 암꽃도 그렇다. 그런데 체구가 작아도 너무 작아서 다 피어도 잘 보이지가 않는다. 운 좋게 꽃송이를 포착해도 화려한 꽃잎이 없으니 저게 꽃인가 갸웃하게 된다. 열매가 되기 전 암꽃의 모습은 성게를 닮은 것도 같고 고슴도치를 떠올리게도 한다. 자세히 다가가서 살피면 가시가 생기기 전의 밤송이를 축소해 놓은 모양인 걸 알 수 있다. 바늘같이 뾰족한 모양의 연둣빛 덮개가 여러 겹 싸고 그 전체를 꽃받침이 다시 감싸는 방식은 씨방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무사히 지켜 내려는 것. 그건 난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궁이 있고 자궁 주변을 장기가 에워싸고 뼈와 지방과 피부 조직 등이 겹겹이 둘러막는 우리 인간의 신체 일부와 너무나 닮았다.

밤나무 암꽃과 열매. 암꽃은 밑씨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씨방을 감싸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 암술머리에 닿은 꽃가루가 암술대를 타고 밑씨에 도착한 후 수정란이 만들어지면 비로소 씨앗이 맺힌다. 그러면 가시 돋은 송이가 밤알이 무사히 영글 수 있도록 돌본다.

밤나무 암꽃과 열매. 암꽃은 밑씨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씨방을 감싸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 암술머리에 닿은 꽃가루가 암술대를 타고 밑씨에 도착한 후 수정란이 만들어지면 비로소 씨앗이 맺힌다. 그러면 가시 돋은 송이가 밤알이 무사히 영글 수 있도록 돌본다.

밑씨에서 이어진 암술대는 식물체 바깥으로 빼꼼 튀어나와 암술머리가 된다. 꽃가루를 좀 더 확실하게 낚아채려고 밤나무는 자신의 암술머리를 축축하게 또는 끈적하게 하는 데 공을 들인다. 대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꽃가루가 암술머리에 닿는 걸 기다리는 것이다. ‘수분’ 또는 ‘꽃가루받이’를 위한 기다림이다. 곤충의 몸을 타고서 사람의 손이나 바람에 온전히 따라가는 방식으로 수꽃이 보낸 꽃가루가 촉수처럼 여러 갈래로 나뉜 암꽃의 암술머리에 속속 도착한다. 그러면 꽃가루는 암술대를 타고 밑씨까지 내려간다. 현미경으로 보면 어딘가로 이끌려 헤엄치는 정자처럼 난핵에 가닿아 수정란을 만드는 과정이 보인다. 그 거룩한 잉태를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은 그야말로 치열하다. 그러고 나면 밤나무는 씨앗을 지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억세진다. 밤알은 온전히 다 영글 때까지 가시 돋은 송이가 돌보게 된다.

개화와 결실을 거쳐 씨앗이 여문다는 건 너도나도 아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볼 여유나 기회가 모두에게 쉽게 찾아오는 것 같지는 않다. 나조차도 그랬으니까. 꽃이 활짝 피었다고 달뜨다가도 꽃이 지고 나면 그만이었다. 식물을 제대로 공부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꽃의 사전적 정의는 ‘종자식물의 번식 기관’이다. 꽃이 핀다는 것은 대를 잇고 종을 유지하리라는 식물의 의지와도 같다. 꽃가루를 어딘가로 보내려고 솨솨 향기를 풍기는 것과 꽃가루를 받으려고 제 몸을 활짝 열어젖히는 것은 이윽고 열매를 맺어 마침내 종자를 퍼뜨리고야 말겠다는 식물의 욕구이기도 하다. 내가 알밤 하나가 여무는 일도 예사로 넘길 수 없게 된 건 그 지극한 엄마의 마음을 밤꽃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허태임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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