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가사 책임지는 '가족돌봄아동'
'독박' 생계와 돌봄, 성인 돼도 계속
"박탈감, 우울증 겪고 미래도 불안"
정부, 실태 파악 아직... "지원 절실"
“흰색은 혈압약, 노란색은 당뇨약, 치매예방약도 있어요. 비타민도 꼭 챙겨야 하고요.”
1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의 한 다세대주택. 중학교 1학년 김서연(13ㆍ가명)양이 거실에서 수십 개의 알약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서연이는 요일별로 구분된 약통에 6종류나 되는 약을 골라 넣었다. 일주일 동안 친할머니(68)가 복용해야 하는 것들이다. 벌써 몇 년째 월요일마다 반복되는 일상이다.
할머니는 7년 전 집을 나간 부모 대신 서연이와 남동생을 홀로 길렀다. 그러다 당뇨, 고혈압 등의 지병이 악화했고, 배 속에서 종양마저 발견돼 수술을 받았다. 서연이는 이미 초등학생 때부터 할머니를 돌봤다. 약시중은 예삿일이고 청소ㆍ빨래 같은 집안일도 도맡았다. 할머니가 장을 보는 날엔 바로 귀가해야 한다. 할머니 혼자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까지 계단을 오를 수 없는 탓이다. 한창 친구들과 어울릴 나이에도 서연이는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뇨로 퉁퉁 부은 할머니의 손발을 걱정한다. 어린이날은 서연이에겐 그저 “지나가는 기념일”일 뿐이다.
초등학생에서 성년까지... '독박' 돌봄의 굴레
5월 5일은 건강한 성장을 위한 아동의 기본권을 되새기는 날이다. 그래서 매년 이맘때면 정치권에서 각종 어린이 보호 대책을 쏟아내고, 기업들의 우대 혜택도 집중된다. 하지만 잔칫상은 언감생심, 가족 돌봄의 최전선에서 신음하는 아이들이 있다. 만 13세 미만 ‘가족돌봄아동’이다. 보호를 받아도 모자랄 판에 간병과 가사, 생계의 무게에 짓눌려 ‘성장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 학업, 취업 등 미래 설계도 먼 나라 얘기다. 어린 어깨에 지워진 돌봄의 짐을 덜어줄 정부 차원의 노력이 절실하다.
아직 가족돌봄아동 규모에 관한 공식 통계는 없다. 아동복지 민간단체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지난해 6월 재단 지원 만 7~24세 아동ㆍ청소년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조사에서 추세를 엿볼 수 있는 정도다. 조사 결과를 보면 전체 응답자(1,494명)의 거의 절반(686명ㆍ45.9%)이 ‘가족돌봄을 제공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 중 157명(10.5%)이 초등학생이었다. 또 5년 넘게 가족을 돌보고 있다는 응답자 194명 중 117명이 중ㆍ고교생이었다. 10대 초반 시작된 돌봄의 질긴 굴레를 청소년기에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치매 할머니를 돌본 박모(25)씨가 그런 사례다. 박씨는 열두 살에 사실상 ‘소녀 가장’이 됐다. 학교가 파하자마자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 식사와 목욕은 물론, 모든 가사를 해내야 했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학원에 가는 또래의 평범한 일상은 사치나 다름없었다. 대학교 2학년이 되자 할머니 치매가 중증으로 발전해 2년을 휴학하고 꼬박 간병에 매달렸다.
10년의 돌봄 생활은 박씨의 삶에 적지 않은 생채기를 남겼다. 미래를 차근차근 준비하는 친구들과 달리 대입이나 취업 기회에서 배제돼 박탈감과 우울감을 도통 떨쳐낼 수 없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하는 잠깐의 일상조차 가족에 ‘죄짓는 일’이 돼 내 꿈, 내 욕심을 포기하는 데 익숙해졌다”며 “미래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돌봄 전가 '효' 문화 그만... 정부 나서야
실제 최근 보건복지부가 이른바 ‘영케어러(Young Carer)’로 불리는 가족돌봄청년(13~34세)을 상대로 조사를 해 보니,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이들에게서 우울감이 나타날 확률(61.5%)이 일반 청년(8.5%)보다 7배 이상 높았다. 특히 서연이나 박씨처럼 돌봄 시작 시기가 이른 경우 심리적 어려움은 더 클 수밖에 없다. 가족돌봄 실태를 전 연령대로 확대해 맞춤별 대책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아동옹호본부 관계자는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노출된 어린이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현황을 파악하는 게 문제 해결의 첫 단계”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처음 시행한 복지부 영케어러 조사 대상에서도 13세 미만 아동은 제외됐다.
‘효자ㆍ효녀’ 프레임에 갇혀 칭찬과 위로만 보낼 뿐, 가족돌봄아동의 현실을 애써 외면하는 사회분위기도 바꿀 필요가 있다. 돌봄 책임을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 안에 가두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박씨는 “성장 권리를 박탈당한 아동ㆍ청소년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나 그간 ‘효(孝)’라는 전통 가치에 가려져 있었다”며 “어린이를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키워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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