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일산병원 보라매병원' 보면, 공공병원 살 길이 보인다

입력
2023.05.05 11:30
14면
0 0

[의사 캐슬 '3058': ⑤벼랑 끝 한국 의료 되살리려면]
지방 공공병원이 살아남는 법

편집자주

한국은 의료 가성비가 좋다고 하죠. 아프면 예약 없이 3,000~4,000원에 전문의를 보는 나라, 흔치 않으니까요. 그러나 건보 흑자, 일부 의료인의 희생 덕에 양질의 의료를 누렸던 시대도 끝나 갑니다. 지방 병원은 사라지고 목숨 살리는 과엔 지원자가 없는데, 의대 정원은 18년째 3,058명입니다. 의사 위상은 높지만 국민이 체감하는 의료 효능감은 낮아지는 모순. 문제가 뭘까요? 붕괴 직전에 이른 의료 현장을 살펴보고, 의사도 환자도 살 공존의 길을 찾아봅니다.

경기 고양시에 위치한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 내부에서 촬영한 정문 모습으로, '연세대의료원 협력병원'이란 내용의 문구가 적혀 있다. 고양=류호 기자

경기 고양시에 위치한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 내부에서 촬영한 정문 모습으로, '연세대의료원 협력병원'이란 내용의 문구가 적혀 있다. 고양=류호 기자


다들 병원 적립금 얼마나 남았나요? 저희는 바닥이 드러나고 있어요. 올해는 어떻게든 버티겠지만, 이대로면 내년에는 어떨지 막막합니다.

지난달 6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지역 거점 공공병원 대표협의체 회의에 참석한 수도권 지방의료원 A 원장은 돈 걱정을 숨기지 못했다. 위기에 몰린 공공의료를 살릴 대안을 찾자며 전국 공공의료 책임자들이 머리를 맞댄 자리였지만, 현장엔 한숨 소리만 가득했다. 병원마다 사정은 조금씩 달랐지만 "공공의료가 임계점에 왔다"거나 "지방자치단체장이 언제 문 닫자고 할지 모르겠다"며 저마다 답답함을 토로했다.

공공병원이 사라져 간다

9.1%.

한국 공공의료가 의료시스템에서 차지하는 비율(병상 수 기준)이다. 한국 의료시스템은 민간이 91%를 차지하는, 철저히 민간의 경제논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장이다. 근근이 버텨오던 공공의료 부문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사실상 회복 불능의 길로 접어들다는 평가가 나온다. 팬데믹 대응 선봉에서 감염자 치료에만 매달렸지만, 코로나 때 병원을 떠난 환자와 의사들이 일상 회복 이후에도 돌아오지 않아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문제는 이대로라면 공공병원이 소생할 가망이 낮아보인다는 점. 공공의료 책임자들은 하나같이 "내년이 고비"라고 한다. 코로나 때 받은 손실보상금과 지원금이 동날 시점이 바로 내년이다. 회생 불능 상태에 빠지기 전 정부의 과감한 투자가 절실하지만, 투자에 인색했던 정부가 갑자기 예산을 쏟아부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날 모인 의료원장들의 걱정엔 이유가 있다. 실제 2020년부터 의료원들의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4일 보건복지부의 지역거점공공병원 알리미 사이트에 따르면 2020년 당해 전국 지방의료원들은 5,260억 원의 적자를 냈다. 2021년 적자가 4,303억 원으로 줄었지만, 그래도 2017년(1,020억 원 적자)의 4배다. 적자가 커진 건 환자가 공공병원에 안 가기 때문이다. 2021년 전국 지 방의료원의 평균 병상 가동률은 59.7%로 2017년(89.8%)에 비해 3분의 2로 떨어졌다.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민간병원과 달리 공공병원은 △필수의료 제공 △지역 의료 격차 해소 △각종 전염병 대비 △보건 정책 집행 등 공적 목적을 가지는 병원이다. 저소득층과 소외계층이 많이 찾는 의료기관이기도 하다. 의료 서비스가 일종의 공공재 성격도 갖는다는 점에서 공공성이 강한 공공병원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세브란스와 협력하는 일산병원의 성공

2021년 12월 1일 경기 고양시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 병동 내부에서 의료진의 부축을 받은 환자가 이동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2021년 12월 1일 경기 고양시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 병동 내부에서 의료진의 부축을 받은 환자가 이동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다만 건강보험 재정이나 정부·지자체 예산이 한정돼 있어 무작정 공공병원에 돈을 쏟아부을 수 없는 한계도 분명히 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공공병원이 자기 장점을 살리고 민간병원의 강점을 적극 수용하는 형태의 사업 모델을 발굴할 것을 제안한다. 그런 면에서 우수 공공병원으로 꼽히는 곳이 바로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서울특별시 보라매병원이다. 두 병원 모두 대학병원과 '원팀'을 이뤄 성공한 사례다.

일산병원에선 '연세대의료원 협력병원'이라고 적힌 문구가 자주 보인다. 세브란스병원 출신 수련의(인턴)와 전공의(전공의), 전문의가 여기서 진료하고 있다는 의미다. 협력병원의 가장 큰 장점은 수련의와 전공의들이 안정적으로 공급된다는 점. 세브란스병원에서 일하는 전공의들은 주기적으로 일산병원에 파견을 가고, 수련의들은 일정 기간 인턴 교육을 받는다. 수련의와 전공의들이 늘 채워져 있으니 인력 문제는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백영범 일산병원 노조위원장은 "현재 전국의 모든 종합병원의 가장 큰 어려움은 전공의의 안정적인 공급"이라며 "협력병원 체계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서울대병원이 운영하는 보라매병원

2020년 8월 26일 오전 서울 동작구 보라매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려는 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홍인기 기자

2020년 8월 26일 오전 서울 동작구 보라매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려는 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홍인기 기자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보라매병원의 성공 이유도 일산병원과 비슷하다. 서울시가 운영하던 시절엔 낙후한 탓에 주민들이 찾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1987년 서울시가 서울대병원에 위탁을 하며 탈바꿈했고, 서울대병원 전공의와 전문의들이 돌아가며 파견을 가 의료인력이 매우 안정적으로 공급된다.

서울대병원이 운영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건 '3차병원화'였다. 서울대병원과 같은 수준 높은 의료 서비스를 하는 병원을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러자 '보라매병원=서울대병원 분원'이란 인식이 자리 잡았다.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인 송경준 보라매병원 대외협력실장은 "공공병원이라고 하면 값싸게 제공하는 시혜성 의료를 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철 지난 옛날얘기"라고 말했다. 수준 높은 의료서비스가 뒷받침돼야 공공병원도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공공병원이 안착하면 지역주민은 바로 혜택을 받는다. 두 병원이 최우선 가치로 삼는 게 민간병원보다 비급여 진료를 적게 하는 '적정 진료'다. 건보공단으로부터 받은 '2021년 건강보험 적용 인구 진료 현황' 자료에 따르면 전국 17개 시도의 1인당 평균 진료비는 약 206만3,800원이었다. 그러나 고양시의 1인당 평균 진료비는 전국 평균보다 29만 원 낮은 177만3,800원이다. 2019년 일산병원의 건보 보장률은 약 72%(노조 자료)였고, 그해 전체 건보 보장률은 64.2%였다. 즉 일산 주민은 일산병원 덕에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의료 혜택을 받는 셈이다.

협력 위해선 '당근'을 준비해야

전날 당직근무를 했던 박대준 이대목동병원 간담췌전문 교수가 12일 오전 간이 침실이 마련된 연구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홍인기 기자

전날 당직근무를 했던 박대준 이대목동병원 간담췌전문 교수가 12일 오전 간이 침실이 마련된 연구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홍인기 기자

두 병원 사례를 보면 공공의료의 성패는 '서민이나 저소득층을 돌보는 병원'이라는 이미지를 넘어서는 데 있다. 민간병원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을 의료 수준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의료인력의 안정적인 공급이 필수조건이다. 충청지역의 한 지방의료원 원장 B씨는 "지방의료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은 의료진 확보"라며 "행정직 간부도 구하기 쉽지 않은데 의사는 더 심하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의사들이 의료원에 올 수 있는 당근을 제시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의사들이 진료 외에 연구 분야에서도 성과를 낼 수 있게 정부가 유인책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보라매병원 위탁운영 초기만 해도 서울대병원 교수들이 파견을 꺼렸지만, 서울대병원이 보라매병원에서도 연구 실적을 낼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자 교수들의 인식이 바뀌었다고 한다. 나백주 서울시립대 도시보건대학원 교수는 "의사들이 (지방의료원에) 안 가려는 이유 중 하나는 당직 근무를 혼자 서야 해 연구나 논문 발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라며 "서울의료원은 의사에게 6개월 해외 연수를 보내주거나 해외 논문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혜택을 주는데, 사실상 이런 곳은 서울이 유일하다"고 지적했다.

공공의료엔 왜 '큰 그림'이 없나

18일 경기 성남시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신경외과 이시운(가운데) 교수가 개두술 수술을 진행하고 있다. 성남=홍인기 기자

18일 경기 성남시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신경외과 이시운(가운데) 교수가 개두술 수술을 진행하고 있다. 성남=홍인기 기자

의사들이 지방의료원에 전속되어 지역에서 붙박이 생활을 하는 걸 선호하지 않는 만큼, 다양한 형태의 유연근무제를 도입하자는 주장도 있다. '개방형 병원'과 '은퇴의사 활용'이다. 개방형 병원은 병원끼리 시설과 장비를 공유해 의사가 어디서든 환자를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제도로, 의료기관 간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다. 은퇴한 의사들을 파트타임 형식으로 활용하면 지방 거주에 대한 부담은 줄이면서 의료 인력 부족 현상도 일부 해소할 수 있다. 조희숙 강원대병원 공공부원장은 "의료원은 관료주의 성격이 강해 의사들이 전속으로 활동하는 걸 꺼리는 측면이 있는 만큼, 탄력적으로 이를 풀자는 것"이라며 "국립대병원, 대학병원, 지방의료원을 중심으로 시작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공공병원 의사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자는 의견도 있다. 윤창규 충주의료원장은 "공공의료기관에 일정 기간 근무하면 국가유공자에 준하게 인정해 주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며 "국민 생명을 지키기 위해 국가와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만큼 예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공공의료에 대해선 주먹구구식 땜질 처방만 해온 만큼, 지금이라도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당부도 있다. 조희숙 부원장은 "일본은 지역의료를 모니터링해 부족 인력을 파악하고 어떻게 채울지 평가하는 지역의료지원센터가 존재하지만 한국은 이런 거버넌스가 없으니 매번 토론만 하고 끝난다"고 지적했다. 이경석 천안의료원장은 "10년 뒤 공공의료를 몇 %까지 늘리고 인력을 어떻게 양성할지 구상하는 주무 부처가 없다"며 "국책연구기관을 둬 공공보건의료에 대한 개념과 역할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글 싣는 순서

<의사 캐슬 '3058'_시한부 한국 의료>

①'슬의생 99즈'는 없다
②투석 환자는 고향에 못 사나요
③의사 빈자리 채우는 PA 유령
④정원이냐 수가냐, 누구 말이 맞나
⑤벼랑 끝 한국 의료 되살리려면


류호 기자
오세운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