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일 한국예술문화명인, 5~10년 진 빼내고 악기 제작
연주자에 따라 악기의 生 달라져
"잘 먹고 쑥쑥 자란 나무는 쓸모가 없습니다."
19년 동안 국악기를 만들어온 김세일(48) 악기장의 말이다. 지난 2월 한국예술문화명인 인증을 받은 그는 2005년 국악기 제작에 입문해 오동나무, 밤나무 등을 깎아 가야금, 거문고, 아쟁, 해금 같은 전통 악기를 만들고 있는 국악기 명인이다.
좋은 악기 제작은 좋은 나무를 고르는 데서 시작된다. 김 명인에 따르면 너무 좋은 환경에서 빨리 자란 나무는 국악기로서 낙제점이다. 아무리 정성들여 깎아도 소리가 잘 나지 않는다. 그 반대도 좋지 않다. 과거에는 '석산(石山)오동'을 제일로 쳤으나 지금은 사뭇 달라졌다. 석산오동으로 만든 거문고는 태종이 열 번째 아들 희령군에게 내린 희령군 어사금(熙寧君 御賜琴,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41호)처럼 600년 가는 명기로 알려져 있으나 연주자가 30~40년을 길들여야 숙성된 소리를 얻을 수 있다.
나무 밀도 제각각, 장인의 정직한 손길 거쳐야
좋은 나무라고 해서 저절로 명기로 탄생하지 않는다. 인고의 세월을 거친다. 그가 가장 많이 다룬 나무는 오동나무다. 오동나무는 가볍고, 습기를 먹지 않아 변형이 적고, 다른 나무보다 소리가 더 울려 악기를 만드는데 최고의 나무다.
시작은 오동나무에서 진을 빼내는 작업이다. 비바람과 추위, 더위에 그대로 노출시킨다. 그 과정을 거쳐야 나무가 틀어지거나 트는 현상을 막을 수 있다. 무엇보다 그렇게 진을 뽑아내야 나무에서 맑은 소리가 난다. 나무에서 악기가 되는 첫걸음인 셈이다. 이 과정을 보통 5년, 길게는 10년까지 지속한다.
원목이 완성되면 악기 모양으로 자른 후 알맞은 두께로 대패질을 한다. 그저 편편하게 깎으면 될 일이 아니다. 일일이 손으로 두드려가면서 부분부분 두께를 다르게 한다. 여간 세밀한 작업이 아니다. 나무의 밀도가 모두 제각각이다. 사람만큼 개성 있는 것이 나무인 만큼 제 소리를 내도록 하려면 그 개성을 잘 살려주어야 한다. 장인의 손끝이 정밀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인두로 지지는 낙동 과정을 통해 진을 모두 뽑아낸다.
장인의 손길을 거쳐 개성 있는 악기가 만들어져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악기의 생도 인생만큼 지난하고 끈질긴 성장의 과정을 거친다. 바람과 햇볕이 키운 나무가 악기로 재탄생하면 주인을 찾는 순서가 남았다.
"악기에 개성이 있는 것처럼, 연주자 역시 좋아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자기한테 꼭 맞는 악기를 찾고 싶어 하는 연주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악기가 좋은 악기입니다. 악기마다 주인이 있는 셈입니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실수 없이 잘 만들었는데 도무지 ‘내가 임자요’하는 연주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5년 세월을 묵혔다. 그 즈음 찾아온 연주자가 줄을 퉁겨보더니 "찾고 있던 명기" 라면서 가져갔다. 말리는데 10년, 주인을 기다리는데 5년, 진이 다 빠진 악기가 드디어 '득음'을 한 셈이었다.
트렌드 변화 주시... "두둥" 첫소리에 항상 가슴 두근
트렌드도 중요하다. 음악에 트렌드가 있어서 선호하는 소리가 조금씩 달라진다. 조선시대에 이미 그랬다. 조선 후기에 산조가 유행하면서 기존의 풍류 가야금보다 폭이 좁고 높은 음이 잘 나는 가야금이 나왔다. 음악의 유행에 따라 악기의 모양이 변했던 셈이다. 이처럼 선호하는 소리는 변하기 때문에 이전에는 열외로 밀려났던 악기가 뒤늦게 각광받을 수 있다.
김 명인은 "연주자들과 꾸준히 대화를 나누고 공연장도 자주 방문하면서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면서 "장인이 아무리 좋은 악기를 만들었다고 자부해도 연주하시는 분들이 외면하면 오갈 데 없는 악기로 전락한다"고 설명한다.
악기장의 손을 떠난 악기는 연주자와 함께 악기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악기의 본격적인 생은 연주자의 손끝에 달렸다. 악기를 연주한다는 것은 악기를 길들인다는 말과 동일하다. 어떤 음들이 스미느냐에 따라 악기의 성음이 달라진다. 좋은 연주자를 만나면 나날이 소리가 좋아진다. 그 반대의 경우는 명기도 평범한 악기로 전락하고 만다.
김 명인은 "오동나무는 나무로 한번, 그리고 악기로 또 한번, 그렇게 두 번의 생을 사는데, 자기밖에 모르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어른으로 성장해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서 "오동나무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위인전처럼 감동스러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가야금을 완성한 후 맨 처음 두둥, 소리를 낼 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제가 한 생을 탄생시킨 것처럼요. 때로 지루한 작업에 지치기도 하지만 악기장으로서의 삶을 마무리할 때까지 그 첫소리가 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 것 같습니다."
최석정 대구한국일보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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