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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엔딩과 주 69시간

입력
2023.04.19 00: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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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파업 눈앞서 장시간 노동과의 결별
꼼꼼함 부족했던 69시간제에 시사점
여성· MZ세대 맞춘 시간규범 따라야

2021년 10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뱅크 의상 디자인 노동자연합 건물 벽에 IATSE 지지 포스터가 걸려있다. AP 연합뉴스

2021년 10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뱅크 의상 디자인 노동자연합 건물 벽에 IATSE 지지 포스터가 걸려있다. AP 연합뉴스

'할리우드 엔딩!' 2021년 10월, 할리우드 영화 제작 현장의 노사협상이 파업 시한을 눈앞에 두고 극적 타결을 이루자 언론들은 이 할리우드다운 결말을 일제히 보도했다. 결렬됐다면 128년 할리우드 영상제작노조(IATSE) 역사상 첫 파업이 시작될 것이었다.

문제의 핵심에는 주 70시간 이상 혹은 그 이상의 고무줄 장시간 노동이 있었다. 일반적으로도 미국에서는 일 조직에 사용자의 재량이 많지만, 영상산업에서의 유연성은 더 높은 편이고 프로젝트 기반 일자리도 많다. 미국 사회는 노동자 집단 행동에 관대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건강과 일상을 위협하는 장시간 노동을 더는 할 수 없다"는 IATSE의 주장은 폭넓은 사회적 지지를 얻었다. 6만여 조합원 중 절대다수가 참여해 98% 찬성률을 보인 파업 결의는 할리우드를 멈춰 세우고야 말 기세였다. 대형 스튜디오나 넷플릭스, 아마존 등 글로벌기업을 대표하는 영상제작자연합(AMPTP)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그 1년여 후, 우리나라에서는 '주 69시간' 화두가 떠올랐다. 노동시간 숫자가 이슈의 중심에 위치한 일은 2018년에도 있었다. 그때는 '52'라는 숫자의 대두에 불편함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어디까지나 '주 40시간제'가 기본인데 마치 '주 52시간 일하기'가 기준인 듯 이해되어 갔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안도감이 더 컸다. 초과노동은 제재 대상이라는 인식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간 규범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가장 큰 발전이었다. 당시 정부는 이를 치적으로 홍보했지만 정부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미 일과 생활의 경계, 생활의 질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져 왔고, 노동 현장의 요구로 이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새 규범이 채 정착되기도 전에 지금 새로운 숫자가 제시됐다. '69'라는 숫자는 현장의 어떤 문제의식, 목소리와 연결될까. 정부는 이 지점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안이했다. '몰아서 일한 만큼 몰아서 쉬자'는 뜻이라고 강변해 봐야 냉소만 따른다. 이미 언론도 노동자도 '69'에 집중하고 있는데 "69시간은 아니고, 60시간 이상? 아니, 64시간?" 하는 식으로 우왕좌왕하는 정부 태도는 상황을 더 꼬이게 했다. 그 자체로 이 정책이 꼼꼼한 시뮬레이션과 숙고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점을 입증한 셈이다.

'할리우드 엔딩' 사례에서 봤듯이 우리 정책 입안자들이 준거로 삼는 미국에서조차, 유연성이 더 큰 영화산업에서조차 '몰아서 일하는 상황'은 문제가 된다. 사실 한국의 상황은 더 만만치 않다. 또 다른 대형 의제인 '인구절벽' 때문이다. 이미 축적된 국제 연구에 따르면 초과노동이 길어질수록 성별 직업 분리와 임금 격차가 커진다. 경력과 성장에 관심이 높은 청년세대, 특히 여성은 이런 상황에서 가족 형성을 주저한다. 불규칙 노동은 문제를 더 어렵게 한다. MZ세대는 한국에서 장시간 노동을 만든 포괄임금제, 연차 사용 촉진제 문제를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을 확장하고, 제대로 근로감독하는 조건을 갖추지 않는 이상 유연노동시간의 새 규범을 만들기는 어렵다.

영화 얘기로 돌아가 보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 영화제작 현장은 지난 10여 년간 표준근로계약 그리고 주 52시간제에 따라 노동시간을 준수해 오고 있다. 이에 영화제작사들도 제한된 시간 안에 최대한의 노동 효율을 끌어올릴 방법을 찾아 혁신해야 했다. 이런 적응력은 최근 커진 OTT시장에서 글로벌 한류를 만들어 낸 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근로시간 규제는 기업혁신에도 도움이 된다.



권현지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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