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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브란트의 '위대한 화해'

입력
2023.04.18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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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폴란드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2차대전 당시 나치독일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했던 옛 유대인 게토의 전몰자 묘역(墓域)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0년 폴란드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2차대전 당시 나치독일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했던 옛 유대인 게토의 전몰자 묘역(墓域)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는 2차 대전으로 갈등과 적대의식에 점철된 독일과 유럽 국가들 사이에 화해를 도모하며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다진 정치가이다. 그는 베를린 시장과 서독 총리(1969~1974)를 역임했고, 신동방정책을 임기 초인 1969년에 발표했다. 이 틀 안에서 경제공동체를 통해 서유럽 협력 강화와 소련을 포함하여 동유럽을 화해의 길로 이끌어갔다. 이 공로로 1971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의 일생은 평탄하지 않았고 정치 일생도 파란만장했다. 그는 사생아로 태어나 계부인 프람(Frahm)에 의해 성장했고 그의 성을 따랐다. 청소년기에 국가사회주의(이하 나치)의 독재에 단호하게 저항하면서, 신변에 위험을 받자 노르웨이로 탈출했다. 1938년 나치 정부가 그의 시민권을 취소하자 노르웨이 시민권을 신청했다. 1940년 독일 점령군에 의해 노르웨이에서 체포되었으나 노르웨이 군복을 입고 있어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중립국인 스웨덴으로 탈출했다. 1940년 스톡홀름 주재 노르웨이 공사관으로부터 여권을 받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브란트는 2차 대전이 종료되자 독일로 돌아왔다. 냉전으로 동서진영의 대결이 심화하는 과정에 서독에서는 동방정책으로 반공 외교정책의 수단인 할슈타인(Halstein) 원칙을 1955년 시작하였다. 이 원칙은 외무장관(1951~1958)을 지냈던 발터 할슈타인(Walter Halstein) 이름을 차용한 것이다. 자유선거를 통해서 정부를 세운 서독만이 유일한 합법 국가로서 승전국 소련을 제외하고 동독을 승인한 나라와는 외교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포고였다. 서독과 소련은 1955년 9월 정식 외교를 체결했다. 갈수록 할슈타인 원칙을 고수하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브란트는 루마니아와 1967년에, 유고슬라비아와는 1968년 외교 관계를 재개했다. 브란트 정권은 1969년 중도파인 자민당과 연립정부를 수립하면서 반공 정책을 거두고 '신동방정책'을 발표했다. 소련과 모스크바 조약(1970년 8월)을, 폴란드와는 바르샤바 조약(1970년 12월)을, 동독과는 운송협정(1971년)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동유럽과 동독과도 화해길을 도모했다. 이는 포용정책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도 이에 속한다. 신동방정책은 동서 유럽과 동서독의 평화를 추진하며 상생의 길을 여는 이정표가 되었다.

사실상 신동방정책의 핵심 인물이었던 바르(Egon Bahr)가 이미 1963년 '접촉을 통한 변화'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동유럽과 동독의 현실 인정을 바탕으로 한 브란트의 정책에 현실적 의미와 방향을 제시했다. 이를 토대로 브란트는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서유럽에서 유럽 통합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는 한편 동유럽과의 관계 개선을 목표로 했다. 이 정책은 우파와 좌파로부터 큰 공격을 받았다. 모든 보수 정당과 2차 대전 이후 동유럽에서 쫓겨난 독일 실향민과 그 후손들은 이 정책을 '불법'과 '대반역'이라고 비판했다. 좌파들은 브란트 정권의 베트남 전쟁을 포함한 미국 정책에 대해 혹독하게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좌우를 가르는 데 매몰되지 않았다. 브란트는 베를린 시장 시절 동독 탈출자들이 베를린 장벽에서 총에 맞아 쓰러진 것을 보면서 공산주의 이웃과 인간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접촉하고 교류함으로써 끔찍한 죽음을 끝낼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한 동서독 기본조약(1972년 12월 21일)을 체결하였다. 이를 통해 상호 주권을 인정하며 1민족 2국가를 승인했다. 이와 함께 현상 유지가 합법화되었고 평등한 관계가 공식화되었으며 두 독일은 1973년 유엔에 가입했다.

브란트는 화해를 위해 나치의 만행에 속죄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나치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고, 유대인이 학살당한 바르샤바 게토를 1970년 방문하고 무릎을 꿇고 희생자들을 기렸다. 사죄한 것이다.

브란트는 자신의 개인 비서였던 기욤이 동독 국가안보부의 스파이 요원임이 밝혀지고 1973년 석유 파동에 기인한 경제적 여파로 1974년 5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독일 통일을 지켜본 이후 1992년 서거한 그는 우리에게도 평화통합의 상징적 존재로 남아 있다.


김해순 유라시아평화통합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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