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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산재노동자 아내의 900일 분투기… "다른 피해자 길라잡이 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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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산재노동자 아내의 900일 분투기… "다른 피해자 길라잡이 됐으면"

입력
2023.04.13 04:0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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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산재 간병 소하랑씨, '휴가갑니다' 출간
정보 부재에 독학으로 공부, 암 진단도 극복
"어렵게 얻은 경험, 다른 산재 가족과 공유"

소하랑(왼쪽)씨가 8일 경남 창원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저서 '휴가갑니다'를 소개하고 있다. 옆은 산업재해를 겪은 남편이다. 냥만공작소 제공

소하랑(왼쪽)씨가 8일 경남 창원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저서 '휴가갑니다'를 소개하고 있다. 옆은 산업재해를 겪은 남편이다. 냥만공작소 제공

2019년 7월 30일, 경남 김해의 페인트 제조공장에서 일하던 남편의 머리와 몸이 기계에 끼었다. 남편을 병원에서 처음 마주한 아내가 형체를 못 알아볼 정도로 큰 사고였다. 의사는 아내에게 세 번이나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남편의 정신력과 체력은 생각보다 강했다. 목숨은 건졌지만 후유증은 컸다. 뇌를 다친 탓에 새로운 기억을 입력하지 못했다. 중증치매에 걸린 노인과 비슷했다. 왼쪽 눈은 실명했고, 만성 심부전증과 당뇨도 찾아왔다.

아내는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산업재해가 분명했으나 정부, 지자체, 국가기관 등 누구도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았다. 스스로 깨우치기로 결심했다. 하루에 3시간만 자면서 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법률ㆍ의학 서적을 탐독했고, 관련 강좌 소식이 들리면 전국 어디든 찾아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쌓인 정보와 간병 경험을 블로그에 차곡차곡 모아뒀다. 그렇게 4년 가까이 됐고, 아내는 책을 펴냈다. ‘휴가갑니다’. 산재 남편을 돌본 간병기이자, 가슴 아픈 회고록이다. 책 제목은 쉬러 가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함께 휴가를 떠나기로 한 날 남편이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하면서 아내도 긴 휴가(간병 생활)에 들어갔다는 뜻을 담았다.

8일 경남 창원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소하랑씨가 책을 소개하고 있다. 냥만공작소 제공

8일 경남 창원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소하랑씨가 책을 소개하고 있다. 냥만공작소 제공

저자 소하랑(예명)씨는 12일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비슷한 처지의 피해자들을 만나며 책으로 엮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2021년부터 한 산재 피해자 커뮤니티에서 활동하고 있다. 피해자들의 처치는 소씨보다 훨씬 열악했다. 산재지원 제도는커녕 '휴업 급여', '중증요양상태' 등의 기본 용어조차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제가 몸으로 부딪혀 얻은 경험이 이들에게 길라잡이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소하랑씨의 간병기이자 회고록 '휴가갑니다'. 냥만공작소 제공

소하랑씨의 간병기이자 회고록 '휴가갑니다'. 냥만공작소 제공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또 있다. 남편 장모(40)씨 사고 후 900일 정도 지난 지난해 초 소씨는 암 진단을 받았다. 또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금세 마음을 다잡았다. 무거운 짐을 주변과 나누라는 긍정적 신호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후 활동보조사를 고용하는 등 가까운 사람들의 도움을 적극 받았다. 그는 항암 치료를 하지 않는다. 대신 필라테스와 등산으로 건강을 챙긴다. 글은 남는 시간에 짬을 내 썼다. 소씨가 이 책을 1,200일(사고 후 4년)이 아닌 900일(3년)의 간병기로 정의하는 이유다.

소하랑씨와 남편의 사연을 다룬 한국일보 기사

소하랑씨와 남편의 사연을 다룬 한국일보 기사

아내의 분투기는 다시 시작됐다. 남편이 죽음 직전의 큰 사고를 당했는데도, 정부 차원의 제대로 된 현장 조사는 한 번도 없었다(한국일보 2021년 7월 6일자). 보도 후 실시된 고용노동부 재조사에서도 폐쇄회로(CC)TV 부재를 이유로 결국 사고 경위는 규명되지 못했다.

여기에 2년간 민사소송 끝에 14억 원의 배상 판결을 받아냈으나, 사업주는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한다. 사업장 압류를 진행해도 어쩌면 배상금을 못 받을 수도 있다. 소씨는 “병원비를 빼고 간병비만 1년에 2,000만 원 넘게 들어간 적도 있다”며 “주변에서 챙겨주는 고마운 분들이 많지만 힘든 것은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하지만 개인적 어려움은 부차적 이유다. 생애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며 겪은 슬픔과 상실, 극복의 여정을 다른 산재 피해자들과 공유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남편, 아이와 남은 시간을 후회 없이 보내면서 산재 피해자들을 계속 돕겠습니다.”

이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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