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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보하지 않는다'는 태극기처럼

입력
2023.04.06 04:30
수정
2023.04.06 07:57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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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5월 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가진 뒤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5월 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가진 뒤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정상회담장에 파견된 의전 담당 외교관이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대통령의 얼굴이라 생각했다. 회담장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테니 사진 잘 받는 위치 선점이 중요하다고 봤다. 보통 사람들도 대통령이 어떤 표정, 자세를 취하고 사진에 찍혔는지를 눈여겨볼 거다.

그러나 외교부 사람들 답변은 달랐다. 태극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고 했다. 맞는 이야기였다. 국격을 상징하니까. 그런데 태극기에 대한 이들의 집착(?)은 어마어마했다. 회담장에 있는 태극기는 일명 ‘369 법칙’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검은색 긴 작대기가 3개인 건괘가 가장 위에, 작은 작대기 6개인 곤괘가 가장 아래 위치하고, 양(陽)을 뜻하는 원의 빨간 부분이 숫자 9처럼 보여야 한다는 거다.

물론 어려운 미션은 아니다. 고충은 따로 있었다. 상대국이 호스트(회담 주최국)가 될 때다. 엉뚱하게 그려진 태극기를 걸어놓고 회담 직전 공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의전 담당자들에겐 천재지변이다. 이에 밤잠 설치는 날이 많다고 했다. 비상사태에 대비해 차량에 태극기를 싣고 다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자회의가 열린 동남아 국가 길거리에 비율이 맞지 않는 태극기가 40~50m 간격으로 걸려 회수하느라 진땀을 뺐다는 이야기나 남미 한 국가의 외교 청사 앞 수십m 높이 게양대에 엉뚱한 태극기가 걸린 것을 보고 직접 밧줄을 끌어당겨 멀쩡한 태극기로 교체했다는 경험담을 들을 땐 무심코 지나쳤던 태극기를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됐다. 우리나라가 호스트인 회담에서 상석(통상 우측)을 상대국 정상에게 양보해도 “태극기 위치는 양보하지 않는다”는 말에 살짝 감동도 했다.

‘캘린더 외교 변수’는 해마다 정해진 시기 벌어지는 악재를 뜻한다. 일본의 △2월 다케시마의 날 △7월 방위백서 △8월 야스쿠니 신사 참배처럼 주로 한일관계에서 일어난다. 지난달 일본 문부과학성의 초등교과서 검정 결과 발표도 그중 하나다. 이번에 통과된 교과서에서 일본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을 더 적극적으로 부정했고, 독도를 자기네 고유영토라 못 박았다.

매년 반복되는 변수라 외교부는 강경 대응보다는 관리에 초점을 맞췄다. 주한 일본대사를 초치해 항의하는 식이다. 정부 당국자가 “일희일비할 사항은 아니다”라고 언급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나 역시 비슷한 생각으로 한일관계 전문가에게 전화해 의견을 물었다. 그런데 “매년 있는 일이라고 우리가 익숙해져 버리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그의 말이 내 머리를 때렸다. 그는 그것을 ‘일본의 무서움’이라 표현했다. “교과서를 조금씩 왜곡하다 보니 10년 전과 비교할 때 큰 왜곡이 돼버렸고, 그것이 일본의 노림수”라는 거다.

한일 정상회담 전후로 ‘국격 상실’, ‘국익 훼손’이란 박한 평가가 나오는 건 ‘캘린더 변수’, ‘대의’라는 이유로 대충 넘어가려는 속마음을 국민에게 들켜서가 아닐까. 정부는 일본 언론이 보도한 독도 영유권 주장,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논란에 대해 국민들에게 속 시원히 설명한 적이 없다. 마지못해 해명이 나온다. 그러니 의심을 거둘 수 없는 거다. 태극기를 각별히 챙겼던 마음으로 대응했다면 어땠을까. 태극기 상석을 양보 안 하듯, 국익도 양보 못 한다는 인상을 줬다면.

정승임 정치부 기자

정승임 정치부 기자


정승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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