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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친구를 사귀어본 적 없는 나...인간관계가 너무 힘들어요

입력
2023.04.10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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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는 학창시절 친구 관계를 잘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다녔던 학교는 대부분 또래 집단과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진학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유치원 때부터 따돌림을 당했어요. 친구를 사귀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자라서인지 대학에 가서도 친구를 사귀지 못했어요. 사회에 나온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거나 갈등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겠어요.

유치원 시절, 선생님이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를 원에 데려온 적이 있었죠. 당시 반 아이들이 모두 책상 주변에 모여 강아지를 구경하고 있었어요. 갑자기 그 강아지가 제 쪽으로 움직였고 당황한 제가 뒤로 물러서자 강아지가 책상 밑으로 떨어져버렸어요. 그 일로 반 아이들이 모두 저를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당함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이후 따돌림이 시작됐는데 그 따돌림이 초등학교에 가서도 이어졌어요. 같은 유치원을 다녔던 아이들이 그대로 같은 초등학교로 진학했기 때문이죠.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당시 어린 저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지내는 방법을 택했죠. 반 아이들이 모여 제 외모를 놀릴 때 저는 입을 다물고 자는 척을 했어요. 체험학습, 소풍같이 야외에서 점심시간에 친한 친구들끼리 앉아 도시락을 먹을 때면 화장실에 들어가 몰래 밥을 먹었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비슷했어요. 공부로 관심사가 옮겨가면서 따돌림이 덜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저에게 다가오는 친구는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유일하게 말을 건넬 때가 미술시간이었어요. 다른 아이들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린다는 이유로 미술수행평가를 대신 해달라고 하면서 말을 걸었어요. 미술수업이 없던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턴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불편한 학교생활 때문에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없었어요. 결국 지원한 대학에 모두 떨어졌습니다. 입시에 실패한 이후 졸업식에도 가지 않고 몇 개월 방안에서만 지냈어요. 그러다 문득, 다시 입시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능시험까지 몇 개월 남지 않은 시점 재수생활을 시작했어요. 돌이켜보면 고시원에 지내면서 한 달 10만 원 용돈으로 생활하면서도 즐거웠습니다. 친구를 사귀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무리를 지어 나를 놀리거나 악의를 갖고 대하지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완전히 다른 환경에 오니 따돌림이 사라졌다는 사실만으로 숨통이 트였죠.

그런데 대학 생활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또래와 교류해본 경험도 없고 일상에서 갈등이 생길 때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피하기 급급했죠. 대학 졸업 후에는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연구실 선배들과 관계가 좋지 않아 한 한기 만에 휴학한 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후 취업을 했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주변인들 모두가 저를 안 좋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취업을 하고 몇 달 버티지 못해 그만두기를 반복했어요.

집은 화목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이 밤부터 새벽까지 싸우는 날이 많았어요. 늘 몸싸움을 하는 두 분 사이에 끼어들어 싸움을 말렸고, '이렇게 사느니 죽겠다'는 엄마의 말이 현실이 될까봐 늘 두려움에 떨었어요. 제 마음과 달리 엄마는 저에겐 차갑게 대하면서 동생만 챙겼습니다. 언젠가 담임 선생님이 엄마에게 제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고 알렸을 때는, 엄마가 오히려 "네가 더 친해지려고 노력해야지"라며 제 탓을 했죠. 아빠는 주말에도 나가는 일이 많아 특별한 기억이 없어요. 결국 부모님은 이혼을 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엄마 흔적을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어린 시절 또래 집단과의 관계, 가족 간의 불행했던 과거가 아직도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대학 졸업 후 10년이 넘었는데 아무것도 이룬 게 없고, 30대가 됐는데 연락할 사람 한 명 없다는 게 너무 허망하고 자괴감이 듭니다. 유일한 즐거움은 인터넷 개인방송을 볼 때예요. 그마저도 제 의견을 채팅 창에 썼다가 다른 사람들이 비난할까봐 두려워 의견 한 줄 써본 적도 없습니다. 이런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가면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을까요.

김지연(가명·32·무직)

지연씨, 사연을 읽고 당신의 고통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친구 한 명 없이 긴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얼마나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것 같았을까요. 그 외로움과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나 아픕니다.

지연씨에게 인간관계는 유독 힘들었던 것 같아요. 우선 그 시작이 된 따돌림의 잘못은 부당하게 지연씨를 괴롭힌 친구들에게 있습니다. 악의적으로 대하는 상대를 두고 "내가 더 노력해야지"라고 생각할 수는 없어요. 지연씨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연씨가 긴 시간 동안 느꼈을 억울함, 답답함에서 오는 감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더군다나 지연씨는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부터도 어떤 도움이나 지지를 받지 못했어요. 상황을 바꾸지도, 감정적인 지지를 받지도 못한 채 학창시절을 보낸 무력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연씨는 긴 사연을 통해 자신이 경험한 바를 아주 자세하게 표현했습니다. 힘든 상황을 겪으면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떻게 반응했으며,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상세히 기억하고 잘 설명해줬어요.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저는 지연씨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섬세하게 알아 차리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지금 겪고 있는 문제 역시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고통스럽더라도 도망가선 안 됩니다. 상황을 회피하지 않는 것만 해도 절반은 성공이에요.

어린 시절 친구들이 놀릴 때 '자는 척'을 하거나 '없는 것처럼 지냈다'고 했었지요. 그것이 지금까지도 지연씨가 겪고 있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부당한 일을 당하면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데 지연씨에겐 그 일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문제 상황을 직면하고 해결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지만 그 전에 상황을 감당하는 고통을 너무 크게 느껴 그 고통을 피하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죠. 흔히 '회피형 성격'이라고 부르는 유형이에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당신이 이런 성격 특성을 갖게 된 건 기질적인 원인도 있을 거예요. 기질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반대의 사람도 있지요. 내성적인 사람은 타인에게 생각을 드러내고 주장을 강하게 하는 데 능숙하지 않아요.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내 생각을 정확히 표현해야 하는데 이게 쉽게 되지 않으니 관계를 형성하는 데도 어려움을 느끼기 쉽습니다. 하지만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과 잘 지내는 능력, 사회성이 없는 건 아니에요. 노력을 통해서 타인과 소통을 하고 마음을 나눈 경험이 쌓이면서 가까운 관계를 형성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지연씨의 사회성 발달이 잘 안 됐던 이유가 뭘까요. 인간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때 기초는 가족입니다. 지연씨는 부모님 두 분과 감정교류가 부족했던 것 같아요. 어머니에 대해 강한 서운함을 느끼면서 전혀 내색하지 않았고, 아버지와는 어떤 감정적인 교류도 없었지요. 사회성은 가장 가까운 가족 간의 관계에서부터 후천적으로 배워가는 과정인데 지연씨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아요. 가정에서조차 나 자신을 인정받고 긍정적인 인간관계를 경험한 적이 별로 없었죠. 부모님에게 서운한 감정을 크게 느끼면서도 상대가 알아차릴까 두려워 입을 다물어버리는 식의 경험들이 반복되면서 내면의 갈등을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것 같아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그 후로도 오랫동안 긍정적인 인간관계를 경험하지 못하면서 인간관계를 아주 쉽게 '수치심' 같은 부정적인 감정과 연결 짓게 됐어요. 그러면서 상대방의 표현 방식이 지연씨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 금세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타인의 태도에서 긍정적인 신호보다 부정적인 신호를 먼저 감지하기 때문에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인간관계라 할지라도 좋은 관계로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긍정적인 경험을 쌓지 못한 상태에서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지다 보니 오히려 더욱 관계를 피하는 악순환이 지금까지 되풀이되고 있어요.

회피적 패턴은 지연씨 스스로 자신의 취약한 점을 알아차리고 노력하면 후천적으로 나아질 수 있습니다. 관계에서의 갈등 상황에 처했을 때 먼저 피하고 싶은 생각이 들 거예요. 자기 주장을 하고 싶거나 화나는 감정을 느낄 때, 이유 없는 수치심이 우선 느껴지면서 행동을 억누르는 회로가 작동하는 거예요. 그때 그 상황을 일단 견뎌보세요. 어떤 대단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피하지만 않는 거죠. 동시에 수고했다고 스스로 다독여 주세요. 평소에도 자신을 돌보고, 존중하고, 자신의 욕구에 주의를 기울이세요. 스스로에게 좋은 부모가 되어주세요. 그런 경험을 늘려나가면서 소수의 사람과 유대감을 쌓으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던 수치심이나 공포 같은 감정이 조금씩 줄어들 거예요. 긴 인생에서 누군가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따뜻한 경험을 분명히 하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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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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