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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사망 2주 전까지 호소 "지진 대국 일본은 왜 원전에 집착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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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사망 2주 전까지 호소 "지진 대국 일본은 왜 원전에 집착하나"

입력
2023.04.03 15:36
수정
2023.04.03 18:35
24면
0 0

3월 28일 71세 일기로 별세
음악의 거장이자 사회 활동가
사망 2주 전에도 공개서한 보내

2017년 9월 3일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린 베니스영화제에 참석했을 때의 사카모토 류이치. 그는 암으로 투병하다 3월 28일 별세했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7년 9월 3일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린 베니스영화제에 참석했을 때의 사카모토 류이치. 그는 암으로 투병하다 3월 28일 별세했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난달 28일 71세를 일기로 별세한 일본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는 세계적 거장인 동시에 원자력발전소 반대, 환경 보호 등에 목소리를 높인 활동가이기도 했다. 고인은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에도 일본 정부의 원전 정책을 비판하고 재개발 사업에 따른 도쿄도의 대규모 벌목에 반대하는 공개서한을 썼다. 말기암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는 와중에도 서한을 보낸 이유에 대해 그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일본 정부의 원전 정책, 세계 최고 지진 국가에서 국민 위험에 빠뜨려"

3일 도쿄신문에 따르면, 고인은 3·11 동일본대지진 12년째를 맞아 지난달 중순 일본 정부의 원전 회귀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다. 지난달 15일 자 도쿄신문에 실린 글에서 고인은 “원전에서 발생하는 방사성폐기물의 처리 방법이 정해지지 않은 채 늘어만 가고, 사고로 인한 오염수와 처리수도 늘어만 간다”고 걱정했다. 또 "(일본 정부의 원전 정책은) 세계 최고의 지진 국가에서 국민을 위험에 빠뜨리고 자신들의 목을 조이는 것”이라며 “이 나라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왜 이토록 원전에 집착하는 것이냐”고 한탄했다.

지난해 말 기시다 후미오 내각은 원전을 가동 연한(최장 60년)이 지난 후에도 운영할 수 있도록 하고, 원전의 재건축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꿨다.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강화한 원전 규제를 대폭 완화한 것이지만, 국회에서 충분한 논의를 하지 않은 채 밀어붙였다.

고인은 지난달 16일 도쿄도가 메이지진구 인근 재개발 사업을 하면서 수천 그루의 나무를 베어내는 것에 대해 고이케 유리코 도지사 등 5명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산림보전단체 ‘모어 트리즈(More Trees)’의 대표였던 고인은 이번 재개발 사업이 “SDGs(지속가능발전목표)라는 세계적 흐름에 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도쿄가 아름답고 매력적인 곳이었으면 한다. 도쿄를 자연과 함께 사는 도시의 성지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고이케 지사는 듣지 않았다.

3월 28일 별세한 일본 출신의 세계적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가 1996년 파리에서 촬영한 사진. 그는 1990년부터 활동 무대를 뉴욕으로 옮겼다.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3월 28일 별세한 일본 출신의 세계적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가 1996년 파리에서 촬영한 사진. 그는 1990년부터 활동 무대를 뉴욕으로 옮겼다.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활자 더미 속에서 보낸 유년 시절... 고교 때도 학생운동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사카모토의 이런 ‘반골 기질’이 어린 시절부터 길러졌다고 보도했다. 아버지 사카모토 가즈키는 1933년 창간된 계간 ‘분게이(文藝)’지 편집장으로 미시마 유키오, 노마 히로시, 다카하시 가즈미 등 ‘거장’이라 불리는 작가들을 세상에 내보낸 전설적인 편집자였다. 고인의 집에는 피아노 대신 책과 작가들의 원고가 널려 있었다. 활자 더미에 둘러싸여 자란 고인의 유년 시절은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했다. 고인이 피아노를 접한 것은 유치원에 다닐 때로, 열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전문가의 사사를 받았다.

고인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고교 3학년 가을엔 시험과 교복 폐지를 요구하며 교장실을 점거하기도 했다. 권위에 맞서고 체제에 반항하는 기질은 음악 활동에서도 나타난다. 도쿄예술대에 진학했으나 "서양 음악은 한계에 도달했다"고 공언하고 전자음악과 세계 민속음악을 탐구하며 전위음악의 선봉에 섰다.

고인이 환경 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사회적 발언을 늘리기 시작한 것은 영화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와 ‘마지막 황제’의 음악을 맡아 세계적 명성을 얻은 후부터였다. 이전에도 탈핵 운동을 한 그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피해 지역 출신 어린이들로 구성된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 감독을 맡아 매년 함께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고인은 여러 차례의 암 수술로 몸이 쇠약해졌던 지난해 3월 도쿄에서 열린 연주회에 출연해 피아노를 연주했다.

2009년 10월 28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류이치 사카모토.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2009년 10월 28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류이치 사카모토.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음악가는 음악만 해라' 우익 세력은 비난

고인은 평화 수호에도 앞장섰다. 2015년 아베 신조 내각이 추진한 안보법제 개정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고, ‘평화헌법’이라 불리는 일본 헌법 9조 개헌에도 반대했다. 그런 그는 일본의 우익 세력에게 눈엣가시였다.

고인이 2014년 처음 암 발병 사실을 밝혔을 때 한 스포츠신문은 “탈핵 운동에 앞장서 왔으니 방사선 치료를 거부할 것”이라는 허위 기사를 냈고, 넷우익들은 “역시 원전 반대는 바보들만 하는 것”이라고 조롱했다. 야마구치 정보예술센터 10주년 기념제의 종합예술감독을 맡았을 때는 야마구치 시의원으로부터 “세금으로 활동하니 정치 발언은 자제하라”고 요구받기도 했다.

고인은 이런 비난과 관련해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음악가는 음악만 하라’는 말을 인터넷에서 많이 듣는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민주주의다. 직업에 관계없이 누구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21년 1월 두 번째 암 발병 사실을 밝힌 전후로 고인은 약 2년 사이에 6차례의 수술을 받았다. 이달 중순 고이케 도지사에게 공개서한을 보낸 직후 도쿄신문 서면 인터뷰에서 그는 “힘든 투병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도쿄 재개발에 대해 발언할 기력도, 체력도 없다. 지금은 체력이 더욱 쇠약해져 개발 반대 운동에 전적으로 헌신할 힘이 남아 있지 않다”고 토로했다.

고인은 그러면서도 “그래도 미래를 생각하면 그 아름다운 곳을 지키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후회할 것이라 생각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탄원서를 쓰기로 했다”고 공개서한을 보낸 이유를 밝혔다. 이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자는 게 아니라 생물다양성과 자연환경을 보전하면서 지속가능한 개발을 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한 류이치 류이치. 고인은 생전 한국의 영화와 음악 등에도 큰 관심을 보인 친한파였다. 미디어캐슬 제공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한 류이치 류이치. 고인은 생전 한국의 영화와 음악 등에도 큰 관심을 보인 친한파였다. 미디어캐슬 제공


도쿄= 최진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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